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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이런저런 정리를 마치고 홈트를 한 후에 자리에 앉아 두유를 한 팩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요컨대 이 두유는 아침 대용인 셈이다. 원래 두유 같은 걸 먹는 버릇은 딱히 없었지만 그가 떠나고 홈트를 시작하면서 아침 대용으로 하나씩 먹기 시작한 것이 이젠 루틴으로 자리를 잡았다.
뭐든지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법이다. 나는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두유가 있다는 걸 요즘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개 한 달에 한 번 정도 두유를 살 때면 가격과 개수, 브랜드 등을 놓고 꽤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대충 고르자면야 마트에서 자체브랜드 상품으로 나오는 두유들이 싼 가격에 비해 개수도 많이 주기 때문에 그냥 그걸 사면 되지만, 또 그것 하나만 한 패턴으로 계속 먹기에는 물리는 감이 있으니까. 얼마 전에는 집 근처 마트에 마실을 갔다가 24팩에 만 원도 안 하는 금액으로 파는 두유를 보고 눈이 뒤집혀서 앞뒤좌우도 생각하지 않고 대뜸 사 온 적이 있었는데, 집에 와서 박스를 뜯어보니 멸균팩이 아닌 파우치 팩으로 된 두유여서 적이 실망을 했었던 적도 있다.(파우치는 진열의 편의성 면에서 멸균팩에 많이 뒤지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그나마 맛까지 둔감한 나조차도 대번 느낄 수 있는 콩 비린 맛이 확 올라와서 한참이나 언짢은 마음에 '이런 걸 제대로 표기도 하지 않고 파는' 마트와 제조 회사에 눈먼 불평을 쏟아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제법 다양한 종류의 두유를 사 먹어 보면서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다. 맛있는 두유는 칼로리가 높고, 칼로리가 낮은(즉 몸에 좋은) 두유는 대개 맛이 없다. 190 내지 200 ml 정도 한 팩을 기준으로 했을 때 대개 무가당 운운, 저칼로리 두유라고 나오는 제품들은 70 kcal 내외인데, 이런 제품들은 대개 맛은 없다. 내 입에 그럭저럭 맛있는 두유들은 그래도 120 kcal 정도는 하는 것들이고, 이런 제품들에는 대체적으로 저칼로리 운운 하는 말은 붙어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고만고만한 두유들 중에 뭔가를 골라야 할 때는 대개 kcal를 보고 100에서 120 정도의 수치가 표기돼 있는 것으로 고르는 편이다. 그래도 아침 대용으로 먹는 건데, 이왕이면 내 입에 맞는 걸 먹고 싶기 때문에.
이번에 장을 보면서도 두유를 한 박스 주문했다. 이번에 산 두유도 행사 상품이었고, 그래서 나는 또 파우치 포장으로 된 두유가 올지도 모른다고 나름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배송돼 온 두유는 아주 평범한 멸균팩에 들어있었고, 오늘 아침에 하나 마셔보니 심지어 맛있기까지 해서 지난번 파우치로 된 두유를 모르고 샀을 때 상했던 빈정까지 단박에 만회시켜 주는 기분이었다. 얘는 열량이 얼마나 되나 하고 팩 뒷부분을 살펴보니 열량이 무려 155kcal이나 된다. 내가 그간 사다 먹어본 두유들 중에서는 제일 열량이 높은 모양이고, 그래서 나는 대번 이 두유가 맛있다는 사실을 납득했다. 뭐든지 맛있는 것치고 칼로리가 낮은 음식 같은 건 없다. 그런 건 아마도, '영원한 사랑'이나 '변하지 않는 마음'처럼 실현이 불가능하며, 관념적으로나 존재할 수 있는 모양이다. 겨우 두유 하나에 이런 거창한 생각까지 할 일인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