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보리'가 있는 홈 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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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이런 것 또한 신포도 기제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나는 옷이나 가방, 신발 등에 필요 이상의 돈을 쓰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가격보다는 내 눈에 들어야 하고 유향을 타지 않는 무난한 디자인이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보는 눈이 없는 탓인지 소위 명품이라고 하는 브랜드에서 나오는 물건들 중에는 저게 왜 그렇게까지나 비싼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들도 더러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생각이 신포도 기제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미리 서두에 부연한 것은, 이런 내 생각들이 어디까지나 그런 것들을 거리낌 없이 향유할 경제적인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의 자기 합리화일 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옷에 돈 들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마트에서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팔고 있는 비싸지 않은 옷들도 자주 사다 입는 편이다. 그런 곳의 옷들은 일단 크게 취향을 타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정도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때문에 실패 확률이 그만큼 낮다. 특히나 집에서 대충 입는 홈웨어 같은 것들은 더욱 그렇다.


작년 연말쯤이었다. 날은 연일 추워지고 집에서 입을 만한 홈웨어 상의나 한벌 정도 살까 하고 마트에 가서 대충, 원래도 비싸지 않은 옷들 중에 그나마 30 퍼센트 세일까지나 하는 것들 중에 적당한 티셔츠 하나를 골라 왔다. 좀 도톰한 원단도 마음에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사다 나르는 회색이나 파란색 계통이 아니라 채도가 낮은 카키색 계열의 좀 나로서는 특이한 색깔인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돈에 이런 걸 샀으면 잘 산 거지. 지금도 입고 있는 그 티셔츠를 내려다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다만 이 티셔츠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수선집 사장님들 식으로 말하면 '시보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 옷을 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보리가 있고 없고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시보리 따위 없이, 그냥 낙낙하게 일자로 떨어지는 소매 디자인은 오히려 꽤 마음에 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 옷이, 집에서 입는 홈 웨어가 아니라 외출복 용도로 산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는 이 옷을 홈 웨어로 입을 요량으로 샀고, 그래서 이 옷을 입고 설거지를 한다든가 행주나 걸레를 빤다든가 하는, 숱한 물 닿는 일을 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때마다 줄줄줄 내려와 기어이 끝을 적시고 마는 소매는 적이 짜증스러워서 이걸 머리 묶는 고무줄로라도 좀 팔뚝에 동여매 버릴까 하는 과격한 생각까지도 가끔 하게 된다.


그렇게 짜증을 내다가도 이 나이를 먹고 아직도 집에서 입는 옷소매에는 시보리가 필수라는 사실조차 터득을 못한 나는, 참 인생을 헛산 것 같다는 생각에 애먼 티셔츠를 지청구하기를 슬그머니 그만두곤 한다. 그와 함께 마트에 가서 티셔츠를 샀더라면 그는 그 이야기를 했을까. 의외로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내게 설거지를 시키지 않았고, 그러니 어쩌면 더 디자인은 예쁘지만 집안 일 하기에는 불편한 옷을 사다 내게 입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싸고돌아 놓고 오늘 같은 날 초콜릿 한 조각 못 주는 곳으로 도망가 있으니 좋으냐고, 오늘은 가서 그런 구박이나 좀 하고 와야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밖에 남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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