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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밸런타인데이여서, 그 핑계로 봉안당에 가서 그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몇 정거정 앞에 내려 늘 가던 동네 마트 말고 조금 더 큰 다른 마트에 갔다. 계란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것은 물론 비할 데 없이 편리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몇 가지 맹점이 있다. 물건을 눈으로 직접 보고 살 수가 없어서 늘 아는 물건밖에 살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예상치 못한 품절 사태에 대처하기가 영 쉽지 않다는 점 정도를 우선 꼽을 수 있겠다. 이번 계란이 그랬다. 나름 15구짜리 상품 중에 할인하는 상품이 있어서 주문을 했더니, 배송 예정 시간 30분쯤 전에 카드 일부 취소 문자와 함께 '품절 상품이라 배송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계란 역시도, 그것 하나만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냉장고라는 물건이 있는 이상 기본으로 갖춰놓아야 할 식재료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계란 하나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러야 했다. 늘 가던 동네 마트가 아닌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다른 마트에 간 것은 집까지 걷는 그 10분 남짓한 거리조차 오늘은 좀 귀찮게 여겨져서였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지만 마트라는 곳은 돈이 없어서 못 쓰는 곳이지 살 물건이 없어서 돈을 못 쓰는 곳은 아니다. 마트에 진열된 그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은, 쓰자고 들면 대개 어디에 어떻게든 쓸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마트로 들어가는 순간 또 계란 하나 사러 와서 온갖 것을 주렁주렁 사 들고 나가는 내 모양을 예상했고 그 예상은 또 어처구니없이 잘 맞았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다 떨어져 갔다. 그렇게 몇 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카트에 담고,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계란을 고르러 계란 코너로 갔다.
와 요즘 계란 왜 이렇게 비싸? 매대를 둘러보자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무슨 동물복지가 어쩌구 유기농이 어쩌구 하는 '비싸고 좋은 계란'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그렇게 겨우겨우 10구에 5천 원이 조금 안 하는 계란으로 마지못해 타협하고 계란을 집으려던 순간, 내 눈에 한 판에 6천 원짜리 행사용 상품이 띄고 만 것이 문제였다. 양은 세 배나 많고 가격은 고작 천 원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차도 없는데 이거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갈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미련스럽게 그 계란 한 판을 들어 카트에 싣고 나와 계산까지를 무사히 마쳤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메고 나갔던 쇼퍼백에 잡다한 것들을 이리저리 쑤셔넣긴 했지만 그 계란 한 판은 도저히 답이 없어서 손에 쥐고 갈 수밖에 없었다. 가외로 요즘 사다 먹는데 맛을 들인 크래커가 커다란 상자로 하나 남아 있었다. 뭐, 타고 내릴 때만 조심하면 그럭저럭 할 만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정류장은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특히나 지금은 출퇴근 시간도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뭔가가 잔뜩 들어 줄줄 흘러내리는 가방을 메고, 손에는 계란 한 판과 크래커 한 박스를 들고 위태위태하게 버스정류장까지 갔다.
손에 든 집이 있을 때의 복병은 버스 카드다. 내 지갑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그하는 방향에 따라 '카드를 한 장만 대 달라'는 경고음이 울리는 일도 드물지 않게 있기 때문에 방향을 잘 맞춰서, 눈치껏 잘 대야 한다. 두 손이 자유로울 때야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데다가 플라스틱 끈이 잘못 묶어진 건지 어떻게 들어도 한 편으로 기울어지는 계란 한 판까지 들고 버스 카드를 잘 찍는 것도 여사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내릴 때 더 그랬다. 우리 집 앞 정류장은 가뜩이나 길게 돌아가는 커브를 한 번 돌아 바로 있기 때문에 양손에 집을 들고 지지봉조차 잡을 수 없는 상황에 미리 출입구 쪽으로 나가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 별 것도 아닌 버스 몇 정거장을 타고 오면서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온갖 기력을 다 쏟고 무사히 내렸을 때쯤엔 이거 진짜 할 짓 아니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서른 개나 되는 계란이 그득하게 찬 냉장고는 일단 좀 든든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또다시 그 마트에서 계란 한 판을 싸게 판다면 그걸 또 사 올 것인지, 그건 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일 것 같다. 차를 태워줄 사람도 없는 와중에 계란 한 판을 버스를 타고 사 온다는 건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공짜로 준다고 해도 못 사 오겠다고, 나는 그의 액자에 대고 투덜거렸다. 물론 말이 그렇지, 공짜로 준다고 하면 또 눈에 불을 켜고 가게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