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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일화가 있다면 아마 원효 대사의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날이 저문 산길을 헤매다가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고 잠결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든 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잠결에 그렇게나 달고 시원하게 마셨던 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더라 하는 이 이야기는 워낙에 유명한 이야기여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심지어 이 일을 겪은 것이 원효 대사 혼자도 아니고 친구인 의상 대사도 함께였으며,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으니 굳이 당으로 유학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을 돌린 원효 대사와는 다르게 의상 대사는 혼자서라도 당으로 유학을 갔다는 마무리까지도 그럼직하다. 사실 나라도 이런 일을 겪었다면 뒤통수를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을 것 같기는 하다. 물론 나 같은 중생은 그런 일을 겪었더라도 다음날 브런치 글감 정도로밖에는 쓰지 못하겠고, 원효 대사 같은 분들은 대오각성의 계기로 삼는 것이겠지만.
이미 몇 번 쓴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집 냉장고에는 오후에 슬금슬금 출출할 때 하루 한 개씩 먹는 용도로 사다 놓은 떠먹는 요거트가 있다. 마트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8개들이 팩으로 사다 놓는 편이고, 대개 1+1으로 파는 이런 제품들은 유통기한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루에 하나씩 먹다 보면 마지막 한 두 개는 꼭 제 날짜를 넘기가 된다. 한때는 그걸 어떻게든 유통기한 안 넘기고 먹어보겠다고 먹는 순서를 짜느라 골머리를 썩이기도 했지만 냉장고 안에 잘 넣어놓기만 했으면 일주일 정도 지나도 끄떡없더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없이, 넘으면 넘는 대로 무던히 잘 먹고 있다.
그러나 그 최장 기록은 딱 일주일이었다. 어제 오후쯤 먹으려고 꺼내 본 요거트는 뚜껑에 박힌 날짜가 2월 5일까지였으니 꼭 열흘이 지난 셈이었다. 아, 이건 좀.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뚜껑을 따고 한 입 먹어나 보고 버리든 말든 결정하자는 생각을 했고, 한 숟갈 떠먹어 본 요거트는 뭐 딱히 이상한 징후를 느끼지 못해서 또 무던히 먹어치웠다. 그리고 하룻밤이 지난 지금까지도 별 탈이 없으니, 역시나 별 이상이 없었던 것은 맞았던 모양이다.
우리 집 근처에는 요즘은 좀체 보기 드문 '슈퍼마켓'이 있다. 마트도 편의점도 아닌, 말 그대로 슈퍼마켓이다. 사실 슈퍼마켓이라기에는 가게의 규모도 영세하고 운영하는 방식도 그다지 체계적이지 못한, 아주 어릴 때 어른들이 부르던 식으로 말하면 '연쇄점' 정도로나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 다소 시대착오적인 가게다. 이런 가게를 두고도 그와 나는 이 집에 그닥 물건을 자주 사러 가지 않는 편이었다. 이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은 대개 유통기한이 촉박했고, 가끔은 하루 이틀 정도가 지나있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세상에 유통기한 지난 물건들을 치우지도 않고 장사를 하다니, 아마도 건물 주인이 소일거리삼아 하는 가게인 게 틀림없다는 둥의 말을 그와 나는 몇 번이나 했었다.
유통기한이 열흘이나 지난 요거트를 보면서 나는 불쑥 그 가게 생각이 났다. 그 가게에서 유통기한이 열흘 지난 요거트를 팔고 있는 걸 봤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두 말 없이 그의 소매를 잡아끌고 가게를 나오지 않았을까. 세상에 날짜가 열흘이나 지난 걸 치우지도 않고 팔고 있다고, 뭐 이런 가게가 다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지 않았을까. 똑같이 냉장고 인에 들어있었던 바에야, 유통기한이 열흘 지난 요겨트가 그 가게의 냉장고 안에 있느냐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느냐는 장소 외에는 아무 차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눈뜨고 볼 수 없는 물건 취급을 당하고, 후자는 그래도 뚜껑을 따고 한 입 먹어볼 생각이 든다. 그 요거트가 어쩌다가 날짜를 열흘이나 넘겼는지, 그 과정을 어느냐 모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내 '태세전환'이 너무나 빠르고 즉각적이라 스스로도 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일생의 대오각성을 하고, 나 같은 중생은 다음날 브런치에 글 쓰는 글감으로밖에 쓰지 못한다는 말을 위에 썼다. 하나 더 있다. 요거트는 냉장고에 잘 넣어두기만 했다면 열흘까지도 괜찮다. 이래서 고승은 고승이고, 중생은 중생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