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간만에, 눈이 아닌 비가 내렸다. 그런 와중에도 날은 그리 춥지만은 않아서 정말로 이 겨울이 물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다.
점심까지를 잘 먹고, 오후 시간까지도 잘 보냈다. 저녁때쯤 커피라도 한 잔 마실까 해서 주방으로 나왔다가, 나는 낯선 냄새에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아주 어렸을 적에 맡아본 연탄가스 냄새와도 비슷한, 썩 유쾌하지 않은 냄새였다. 어디서 가스가 새나? 그 순간 뜨끔 놀라 온몸이 굳어졌다. 점검도 꼬박꼬박 받고 있고 뭘 특별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왜? 그러나 일단 한 번 든 공포심은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일단 조심스레 닫아두었던 창문 하나를 한 뼘 정도 열어놓고 커피 한 잔을 따라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하던 일에 집중하느라 그 일을 한 몇 시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제는 밤이 된 후였다. 이제 다 마신 커피잔을 씻어놓고 잠자리에 들려고 주방으로 다시 나갔다가, 나는 아까의 그 냄새가 아직도 나고 있다는 사실에 제대로 겁에 질리고 말았다. 나는 부랴부랴 방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했다. 가스 누출 의심이 있을 때는 무조건 해당 지역의 가스 공사 쪽에 연락을 해야 하며, 그 신고는 24시간 접수가 가능하다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밤 열두 시도 넘은 시간에 부랴부랴 전화를 해서 집에서 가스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확인 전화가 한 통 온 후, 점검팀은 30분쯤 후에 왔다. 일처 서너 가지나 되는 장비를 늘어놓고 가스레인지 뒤의 배관부터 얼마 전에 간 보일러 배관까지를 장비를 바꿔가며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밸브가 달린 곳에는 비눗물을 분사해 가며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렇게 근 한 시간이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연신 늦은 시간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나에게 직원 분들은 가스는 위험하니 신고하신 건 잘하셨다고, 일단은 특별한 이상 증세가 발견되지 않으니 너무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해 주셨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기압이 낮아져서 환기가 잘 되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나지 않던 하수구 등의 악취가 역류해 가스 냄새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으니 며칠 더 살펴보시고 그래도 이런 증상이 계속되거든 다시 연락을 주시라는 말씀도 친절하게 덧붙여 주셨다. 그렇게, 아닌 밤중의 가스 누출 의심 소동은 그런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어지럽혀진 집안을 대충 치우고 방으로 돌아오니 새벽 두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번 주는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월요일 새벽부터 멘탈이 박살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까 잠시 가스가 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공포심을 생각했다. 이미 몇 번이나 나만 이 더럽고 힘든 세상에 팽개쳐놓고 혼자 도망가서 잘 먹고 잘 살면 다냐고, 이럴 거면 나도 좀 데려가라는 생떼를 써놓고, 사실은 진짜로 죽는 건 무서웠구나. 그런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아직은 다시 만날 때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