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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내가 진심이었던 것 중의 하나는 '커피'였다. 근래 몇 년간 우리는 원두커피 내려먹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유명한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파나마 게이샤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강릉까지 가보기도 했고 인터넷 곳곳을 뒤져 동티모르라든가 미얀마라든가 하는 다소 생소한 지역의 커피를 주문해서 먹어보기도 했다. 처음엔 커피메이커를 쓰다가 핸드 드립으로, 모카포트로, 콜드 브루까지, 조금씩 다른 기구로 커피를 내려 그 맛을 비교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 입문할 때는 분쇄된 원두커피를 사다가 나중엔 결국 핸드밀을 샀다. 핸드밀로 원두커피를 가는 게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가 떠난 후 우리 집 홈 카페는 사실상 폐업했다.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이 나 혼자 마실 커피를 갈겠다고 핸드밀로 커피를 갈고, 그 핸드밀 속에 든 가루를 털어내는 일을 견디는 것이었다. 그가 떠나던 전날도 우리는 커피를 갈아 콜드 브루를 내려 놓았었다. 원래라면 다음날 아침쯤 병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었어야 했을 그 더치커피는 갑작스러운 그와의 이별 때문에 내리기 시작한 지 근 40 시간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고 가까스로 병에 옮겨 담은 후에도 근 2주 가까이를 다 먹지 못했다.
그가 사다 놓은 먹을 것들을 웬만하면 썩혀서 내다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후 나는 조금씩 다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콜드 브루 정도가 한계였다. 한 번 갈아서 내려놓으면 일주일 정도는 먹을 수 있으니까. 나 혼자 한 번 먹고 치울 커피를 내리기 위해 드립이나 에스프레소 용 커피를 가는 것을, 나는 차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꼴로라도 제 할 일을 하는 콜드 브루 메이커와는 달리 드리퍼와 모카포트들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채 두 달 가까이 방치되었다.
어제는 날씨가 좋았다. 하늘이 맑았고, 햇빛이 좋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그래서였을까. 아아메 내릴까 하는, 오늘은 아아메를 내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던 것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사진 액자를 향해 아아메 먹을까? 하고 동의를 구했고 제멋대로 승낙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제일 좋아하던 파나마 게이샤 원두를 꺼내 두 스푼을 떴다. 모카포트용 분쇄는 가루가 고운 데다 파나마 게이샤 원두는 다른 원두에 비해 딱딱한 편이어서 제법이나 용을 써서 갈아야 했다. 갈아낸 커피를 모카포트에 옮겨 담고 10분 가까이를 가스 레인지 곁에 지켜 서서 커피를 내렸다. 그가 있을 때는 두 번을 내려야 했지만 이제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커피를 내리고, 핸드밀 속에 든 가루를 털고, 사용한 모카포트를 씻어놓고, 나는 내린 커피에 얼음을 잔뜩 타 책상 앞으로 가져왔다. 기분 탓인가, 그와 함께 마시던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두 달 만에 마시는 수제 아아메였다.
그렇게 나는 또 그가 없는 남은 내 삶의 한 발자국을 다시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