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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전자레인지가 없다. 몇 년 전 쓰던 것이 고장 나 바꿀 타이밍에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전자레인지 대신 비슷한 크기의 오븐을 샀기 때문이다. 그는 워낙에 하나를 먹어도 맛있게, 제대로 해서 먹어야 한다는 주의여서 그게 무엇이든 전자레인지에 대충 데워 대충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에 우리는 워낙에 빵을 많이 사다 놓고 먹던 터라, 냉동실에 넣어둔 빵을 맛있게 해동해서 먹기 위해서는 함유된 수분만 데우는 방식의 전자레인지보다는 전체적으로 따뜻하게 만드는 오븐이 좀 더 용도에 걸맞기도 했다.
그렇게 산 오븐을 한동안 참 잘 썼다. 우리는 그 오븐으로 하루에 한 번씩은 사다 놓은 빵을 데워 먹었고 가끔은 닭을 사다가 제법 그럴듯한 오븐 구이를 만들어 먹기도 했으며 아주 가끔 내가 기분이 내키면 바스크 치즈 케이크나 소금빵 같은 것을 구워 먹기도 했다.(어쩌다 가끔 하는 베이킹은 거의 유일하게 그가 아닌 내가 전담해서 하는 요리였다) 10만 원도 안 하는 싼 가격에 산 것 치고 오븐으로 해 먹는 음식들은 대개가 만족스러워서, 그때마다 그는 몹시 으쓱거리며 거 보라고, 전자레인지 말고 오븐 사길 잘했지 하고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를 치곤 했다.
그러나 그러던 오븐은 그가 떠나고 난 후로는 자의 반 타의 반 개점휴업 상태다. 일단 그가 떠나고 난 후로 나는 예전처럼 일주일에만 몇 만 원어치씩 빵을 사다가 냉동실에 재 놓는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 먹는 빵이 그럴진대 베이킹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우리 집 오븐은 내내 놀다가, 아주 가끔 집 근처 베이커리에서 사 온 소금빵을 데워 먹거나 냉동 피자를 데울 때, 가끔 뭔가 바삭바삭한 것을 먹고 싶어지는 날 라면에 마요네즈와 설탕을 바르고 그 의에 스프를 뿌려 10분 정도 구워서 만드는 수제 라면땅을 만들 때나 가끔 등판하고 있다.
그에 비해 전자레인지가 없어서 불편한 점은 이루 말로 다 하기가 힘들 정도다. 일단 무조건 냉동실에 넣어놓는 식재료들을 해동하기 위해서는 빠르면 전날 저녁, 늦어도 그날 아침에는 미리 꺼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이니 햄버거니 하는 것들 역시도 함부로 사다 먹기가 어렵다. 무엇보다도 집에 전자레인지만 있었더라도 이틀에 한 번 꼴로 밥을 하는 지금의 내 패턴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냉동실에 얼린 밥은 전자레인지가 없이는 해동이 쉽지 않고,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이틀에 한 번식 밥을 해서 첫날은 더운밥을 먹고 이튿날은 찬 밥을 먹는다는 지금의 내 패턴이 생겨난 것이니까.
얼마 전 지인께서 보내주신 오뎅을 냉동실에 착착 쟁여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깜빡 잊고 꺼내 놓지를 않아서, 꽁꽁 언 그 오뎅을 써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럴 때 전자레인지만 있었어도 대충 한 30초만 돌리면 간단할 것을. 그래서 오늘도 책임도 못 질 짓을 해놓고 혼자 도망가버린 그에 대한 귀먹은 원망이 쏟아진다. 저런 걸 들여놨으면 천년만년 옆에서 맛있는 걸 해주던가. 나더러 뭐 어쩌라고 오븐만 떠 안기고 도망갔냐고. 물론 요즘 전자레인지 딱히 비싸지도 않고, 정 불편하면 하나 들이면 되는데도 굳이 안 그러고 있다는 건 비밀이다. 그런 것쯤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