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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순이의 외출은 대개 피곤하다. 집에 늘 있다 보니 체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웬만해서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버티는 집순이는 그 특성상 한 번 집 밖에 나가면 온갖 일을 다 보고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또 당분간의 집순이 라이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께도 좀 그런 날이었다. 날 바뀐 인사를 하러 봉안당에 갔다가 몇 군데 볼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엔 거의 파김치 직전까지 지쳐 있었다. 다음날은 하이라이스를 끓여 먹을 예정이고 그러자면 감자를 사야 했다. 이 감자로 말할 것 같으면 얼마 전 분명 마트에서 주문했으니 품절이 났고 대체할만한 상품이 없다는 이유로 마트 측에서 일방적으로 주문 취소를 해버린 물품이라 짜증이 배로 났다. 그래서, 그 감자 한 봉지를 사러 집에서 10분이나 떨어진 마트 근처에서 내려서, 마트에 들렀다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지? 여기까지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에라, 그냥 조만간 사야 될 품목 이것저것 땡겨서, 마트에 주문하자. 나는 그렇게 적당히 피곤한 나 자신과 타협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마트라는 곳은 돈이 없는 게 문제지 살 물건이 없어서 문제일 수는 없는 곳이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몇 가지만 담다 보면 최소 주문 금액은 금방 훌쩍 넘긴다. 이번엔 사태가 조금 심각해서, 쌀과 고춧가루와 올리브유를 담으니 그것만으로 이미 최소 주문 금액을 넘었다. 그렇게 소소하게 필요한 몇 가지를 더 주문한 후에 다음날 아침 배송으로 주문을 마쳤다. 이제 다음날, 그러니까 어제 아침에 무사히 배송이 오기만 하면 그걸로 하이라이스를 맛있게 끓여서 먹으면 될 참이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아침, 나는 몇 시쯤 배송이 오려는지 확인해 보려고 마트 배송 확인 페이지에 들어갔다가 내가 주문한 일시가 어제가 아닌 오늘인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했다.
그러게, 어쩐지. 어제 주문한 시간이 오후 네 시도 넘었는데 그 시간에 주문해서 바로 다음날 아침까지 배송된다는 게 좀 의아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어떻게 철석같이 오늘 배송이라고 믿고 있었는지. 덕분에 하루에 겨우 한 끼 먹는 내 식사 스케줄은 왕창 꼬이고 말았다. 물론 집에는 이럴 때를 대비해 쟁여놓은 참치캔도 있고 스팸도 있지만 나는 이미 뭔가를 요리할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런 나사 빠진 짓을 하는 거냐고,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슬슬 도가 지나친 비난을 향해 갈 그쯤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가는 계란말이 김밥집에 갔다. 이 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며칠 전에도 한 번 불쑥 생각이 나서 주문 앱을 켰다가 내부공사 중이라는 공지를 보고 입맛만 다시며 주문을 포기하고 그냥 곱게 라면이나 끓여 먹는 것으로 그날 끼니를 때운 적이 있는 집이었다. 그 집이 공사를 마치고 문을 여는 날이 정확히 어제였다. 그래서, 나는 간만에 그 집의 계란말이 김밥을 굳이 포장해 오지 않고, 새로 바뀐 업장의 면벽한 혼밥석에 앉아 맛있게 잘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날짜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그깟 10분쯤 걷는 게 힘들고 귀찮아서 그날 바로 감자를 사 오지 않고 마트에 주문했다가 이런 법석을 떨고.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이럴 때 대충 한 끼 먹을 만한 스페어도 좀 미리미리 준비해 놓지 않고. 어제 일어난 그 사건 하나만으로도 나를 야단칠 건수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한다. 이제 내게는, 그런 식으로 야단맞은 나를 '우쭈쭈'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평생 그런 거 해줄 것처럼 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말이다.
이제는 더러 나사 빠진 짓을 하고 정신줄을 놓아도 내가 나를 너무 야단쳐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세상에 내 편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건 너무 서러운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