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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한 분이 회사에서 연일 시달리고 계신 모양이다. 위에서는 위에서대로 난리, 아래에서는 아래에서대로 난리, 나더러 어떡하라는 거냐는 하소연을 늘어놓는 그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내가 다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근 몇 주 째 택시를 타고 퇴근해 잠만 자고 다시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나 이러다 아무래도 내 명에 못 살 것 같다는 말을 듣고도 이런 일에 제3자가 흔히 그러하듯 힘내라 기운 내라는 입에 발린 말밖에 해줄 것이 없어서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럴 게 아니라 커피 쿠폰이라도 하나 보낼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 한국 직장인에게 커피는 음료수가 아니라 MMORPG의 포션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적당하게 지점 수가 많아서 교환하기 쉬운 카페의 호불호 안 탈만한 메뉴가 뭐가 았을까를 한참 뒤지다가.
나는 봄 한 달 정도만 반짝 파는 슈크림라떼가 벌써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그렇다. 그게 또, 먹어보면 그렇게까지 천상의 맛은 아니다. 달고 부드럽지만 그냥 그럴 뿐이다. 맛있는 것으로만 따지자면야 통상의 바닐라라떼만 되어도 한결 안정적이고, 그러면서도 든든한 달콤함을 준다. 나는 그런 것에 별로 소질이 없지만 토핑을 이것저것 뿌리고 좀 복잡한 옵션을 줘서 주문하면 깜짝 놀랄 만큼 맛있는 음료도 만들 수 있다는 모양이니, 슈크림라떼라는 것은 그렇게나 특별한 물건은 사실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특별하지도 않은 슈크림라떼는 해마다 아직 날이 쌀쌀할 요 무렵부터 시작해서 꼭 한 달 남짓만을 팔고 알짤없이 메뉴판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 가끔 사는 데 바빠 넋을 놓고 있다가 아 봄 가기 전에 한 잔 사 마셔야지 하는 생각에 가 보면 이미 메뉴가 철수되고 난 뒤였던 기억도 몇 번이나 있다. 아니, 그까짓 게 뭐라고 이렇게 비싸게 구는 거냐고 투덜거린 기억이 한두 번도 아니고 꽤나 자주 있으니까. 요행히 올해는 어떻게 운이 좋아서, 슈크림라떼가 메뉴판에 출몰하기 시작한 직후에 내 눈에 띈 모양이다.
기프티콘 두 개를 주문해 하나를 지인에게 보내고 하나는 내 핸드폰에 저장했다. 이렇게 해 두면 결제한 값이 아까워서라도 일부러 챙겨서 교환해 먹게 되겠지, 뭐 그런 생각에서다. 이 달이 가기 전에 집 밖에 나갈 일 한 번이 안 생길 리는 없으니 그걸로 이 봄을 맞는 작은 세레머니로 삼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올해도 봄은 오고, 슈크림라떼의 계절도 돌아왔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몇 년 전 봤던 어느 영화에서,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한글을 배워서 저런 문장을 쓰는 장면이 있다. 그러게. 봄도 돌아오고 슈크림라떼도 돌아오는데 가 버린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돌아오기는 돌아오는데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나 좋을 대로 생각해 버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