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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는 끓인 물을 식수로 쓴다. 알곡 옥수수차와 보리차를 대강 1대 1의 비율 정도로 섞어서 끓인다. 둥굴레차를 넣으면 맛이 좀 더 좋긴 하지만 둥굴레차는 워낙 독보적으로 비싸서 잘 사다 놓지 않고, 결명자차는 눈에 좋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싸한 맛이 부담스러워서 역시 잘 사 먹지 않는다. 저 레시피는 나름 그가 몇 년이나 이렇게 저렇게 끓여 먹어본 결과 우리 입맛에 제일 잘 맞는 비율이라고 공인한 것이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마시는 물이야 그런 식으로 끓여서 먹으면 된다고는 하지만' 끓인 물'이 아닌 물이 필요한 경우는 얼마든지 생긴다. 비근한 예가 얼음을 얼릴 때이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타 마시는 아이스티를 탈 때도, 오이냉국이라든가 냉라면 같은 끓이지 않는 국물 종류를 만들 때도 그냥 수돗물을 쓰기는 어딘가 꺼림칙하고 그렇다고 곡물 맛이 나는 끓인 물을 쓸 수도 없는 순간은 상시로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생수를 2리터들이 여섯 병이 든 한 팩 정도 늘 사다 놓곤 한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져 운전을 하지 않게 된 이후로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를 주던 것이 저 생수 문제였다. 일단 생수는 마트에서 사는 것이 가장 싸고, 동네에서 살 수 있는 생수 중 요행히 좀 싼 것을 찾았다 해도 그 무게의 자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그걸 집까지 들고 오는 것이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마트에 주문을 할 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생수는 꼭 사야 했다. 이런 사이클을 거치다 보니, 원래 핸 팩 정도를 상비해 놓던 우리 집 생수는 두 팩 정도로 늘어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는 또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졌다. 이미 이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웬만큼 읽으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비해 턱도 없이 뒷손이 없고 뭔가를 꼼꼼하게 살피는 성격도 못 된다. 집 근처 마트에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이것도 사야겠고 저것도 사야겠고 하는 식으로 카트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담다가, 아 이러느니 그냥 금액 맞춰 배달시키자 하고 지르는 일도 꽤 드물지 않게 있다. 그래서, 이런 패턴을 거쳐서, 원래 두 팩 정도를 상비해 놓던 우리 집 생수는 이제 세 팩 정도로 비축 분량이 늘어났다.
하다 못해 지금이 얼음을 많이 쓰는 여름인 것도 아니고, 그러니 사실 여분으로 쟁여놓는 생수는 한두 팩이면 충분하다. 세 번째부터는 그냥 자리나 차지하고 있을 뿐이며, 혹시나 만일의 일(그게 뭔지도 정확히 모르는)이 생겨도 생수 못 쓸 일은 없다는 심리적인 안도감 정도나 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세 팩씩 생수를 재 놓는 생활이 2년이 가까워 오자, 나는 비축해 둔 생수가 두 팩으로 줄어들면 그때부터 불안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아, 생수 사 와야 되는데. 대충 계산해 본 결과 나는 2리터짜리 생수를 이틀은 조금 넘고 사흘은 조금 안 되는 기간 정도에 쓰는 모양이라 대략 일주일에 두 병 조금 넘는 생수를 쓰고, 그러니 두 팩 정도를 비축해 놨다면 한 달 정도는 전혀 생수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래도 쌓여있는 생수가 두 팩 아래로 줄어들면 나는 그때마다 이상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쯤 되면 이건 비축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겠지만.
쌓여있는 생수가 두 팩 아래로 줄어들어서, 아 저놈의 생수를 사려면 또 마트에 주문을 해야 하는데 이번엔 아무리 생각해도 금액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아니 한두 주일쯤 더 지나서 자연스럽게 마트에 주문할 때가 되면 그때 두 팩 정도를 시켜버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애시당초에 그 별 것도 아닌 생수를 사다 재 놓는 것에 왜 이렇게까지 진심인지도 잘 모르겠다. 단순히 그가 남겨놓은 흔적들 때문에 그런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째 좀 미심쩍다. 뭐든지 다 떠난 사람 때문에 그렇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제 조금씩 줄여가야 할 텐데, 그게 언제나 가능할지는 여전히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