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는 셀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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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인터넷으로 꽃을 사는 일에는 몇 가지 변수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발송일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제품'의 경우라면 주말이 끼지 않은 이상 결제를 하고 난 다음날, 혹은 늦어도 그다음 영업일쯤에는 대개 그 물건은 내 손에 들어와 있게 마련인데 꽃의 경우는 좀 그렇지가 않다. 정확한 사연은 잘 모르지만 출하라든가 하는 부분에서 몇 가지 변수가 있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무려 3월 5일쯤 주문한 장미를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사다 꽂아두었던 튤립이 근 일주일을 버티고 어제 명을 다했다. 튤립은, 정말 이쯤 되면 무사시보 벤케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이번 튤립들 또한 그렇게, 바로 전날 저녁까지도 멀쩡했다가 다음날 아침에 우수수 꽃잎을 떨구며 꼿꼿하게 선 채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서 졸지에 꽃병이 텅 비어버렸고, 그 자리를 대체할 꽃을 사러 집 근처 마트에 갔던 참이었다. 정말로,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꽃만 사 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트라는 곳은 어지간한 자제력과 인내심이 없이는 당초 사려던 물건만 딱 사고 나올 수 있게끔 생겨먹은 곳이 아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자고 마음먹은 것부터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우유도 다 떨어져 가고. 그러고 보니 비엔나소시지 좀 사다가 '쏘야'도 한 번쯤 해 먹었으면 좋겠고. 그러고 보니 사다 놓은 라면도 다 떨어져 가고. 그러고 보니 요즘 이틀에 한 박스씩 먹어 없애고 있는 크래커도 한 박스 사가야겠고. 카트조차 끌지 않은 맨손으로 들어왔던 나는 기어이 다시 입구로 나가서 캐트를 끌고 들어와 본격적으로 충동구매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트 안을 빙빙 돌다가, 나는 초콜릿 코너 앞에서 잠시 발을 멈췄다.


오늘은 화이트 데이다. 당연히, 그가 곁에 없는 지금 내게는 사탕이고 초콜릿이고 그런 걸 챙겨주는 사람은 없다. 다행히 그가 없이 처음 맞았던 작년 화이트 데이는 그래도 내 마음이 많이 가라앉고 난 후였던지라 그렇게까지 깊은 삽질을 하진 않고 어찌어찌 잘 지나갔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올해도 그래야 하겠지.


그래서 나는 지난 발렌타인데이 때도 혼자 사다 먹은 밀크초콜릿 한 봉지를 집어 카트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여기서, 당신이 그러고 도망간 덕분에 2년 재 고깃집 박하사탕 하나 못 받고 있다고 징징대고 있지만 그건 그 동네로 도망간 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차피 셀프로 자력갱생해야 되는 처지는 이제 똑같으니 당신도 거기서 사탕이라도 한 봉지 사 먹으라고 말해주고 와야겠다. 떠나기 얼마 전쯤부터 유독 좋아하던 그 청포도 사탕으로다가.


결국 비어버린 꽃병에는 프리지아를 사 와서 꽂았다. 노란색이 아닌 흰색 프리지아도 있다는 걸 나는 이번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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