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라면에 밥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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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한국 사람은 평균적으로 1년에 80개 정도의 라면을 먹는다고 한다. 대충 계산해도 4, 5일에 한 번 꼴로는 라면을 먹는 셈이다. 이 정도면 거의 한국인의 소울 푸드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라면은 우리 집에서는 조금 찬밥이었다. 그가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라면을 끓여먹을까 말까 했는데, 그나마도 따로 다시를 낸 물에다 파, 양파, 표고버섯, 다진 고기 등등 부재료를 잔뜩 넣어서 라면이라기보다는 무슨 탕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서 먹었다. 그와는 달리 나는 라면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고 그래서 가끔은 별 것 넣지 않고 끓인 레어한 라면 맛이 고플 때가 있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딱히 그런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얻어먹는 주제에 그런 괘씸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들켜서 그랬는지, 나는 그가 끓여주는 '거한' 라면을 이제 다시는 먹어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와 나의 라면 취향 중에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나는 웬만해서는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지 않았다. 사실 그건 라면뿐만 아니라 다른 국들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국물에 밥을 말았을 때 국물이 뿌옇게 변하면서 맛이 탁해지는 게 싫었다. 국물에 비해 밥이 너무 많으면 '국에 밥을 만' 것이 아니라 '밥에 국물을 조금 넣어 비빈' 듯이 되는 그 식감도 별로였다. 그래서 나는 꼬박꼬박 따로 밥그릇을 갖다 놓고 밥 한 숟갈 국물 한 숟갈 하는 식으로 따로 떠서 먹었다. 그는 그런 나를 무척 신기해했다. 응. 뼈대 있는 집안 규수라서 그래. 그럴 때면 나는 번번이 그렇게 대꾸했다. 원래 양반은 국에 밥 말아서 먹는 거 아니라는 실없는 소리와 함께.


그가 떠나고,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꼴로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 한 번에 일인분씩 밥하는 게 도저히 답이 없어서, 한꺼번에 이인분의 밥을 해서 일 인분은 먹고 일인분은 밥통 안에 남겨 놓는다. 그러면 식은 밥 일인분이 남은 다음 날은 대개 그 식은 밥으로 해 먹을 수 있는 뭔가를 해 먹거나 라면을 끓여서 같이 먹거나 하는 식으로 식단이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내가 뼈대 있는 집안 규수 코스프레를 할 수 있었던 건 금방 한 따뜻한 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식은 밥을 들고는 뼈대 있는 집안 규수가 아니라 중전 마마가 와도 밥과 국물을 따로 먹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어차피 나 혼자 먹는 밥상에 치울 그릇 하나를 더 꺼내는 것도 귀찮기 때문이다. 라면을 끓여서 면만 후루룩 건져 먹고, 국물이 남은 그릇을 주방으로 들고 가 밥을 말아서 가져온 후에 다시 몇 숟가락 떠먹고 치우면 그것으로 그날의 식사는 끝이다. 그까짓 그릇 하나를 더 꺼내는 정도의 여유마저도 지금의 내게는 없는 셈이다.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그가 내 곁에 있던 시절의 나로 100 퍼센트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가지가 부러져버린 옹이처럼 그의 흔적들은 영영 내 가슴에 박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라면 옆에 더운밥을 떠놓고 밥 한 숟갈 국물 한 숟갈 따로따로 떠먹던 그날들이 이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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