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Mar 19. 2024

철 좀 듭시다

-113

그러니까, 원래는 '쏘야'를 해먹을 예정이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콩나물국을 끓여 한 끼는 잘 먹었으나마 반찬도 없이 국 하나만 달랑 놓고 밥 먹기가 영 심심하던 차여서 그랬다. 그래서 며칠 전엔 긴히 비엔나소시지도 한 봉지 사다 놓은 참이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다, 집에 있는 야채를 약간 썰어 넣고 볶다가 비엔나소시지를 넣어서 조금 더 볶고, 케첩에 고추장에 물엿 굴소스 다진 마늘 적당량을 섞어만든 소스를 부어서 몇 분만 더 볶아주면 된다. 그러니 내 밥 먹는 스케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료를 이것저것 꺼내놓고 이제 양념을 꺼내려던 찰나 나는 대번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케첩이 없었다. 얼마 전 몇 달 만에 시킨 햄버거 딜리버리에 감자튀김을 찍어먹을 케첩이 하나도 오지 않았고, 그까짓 케첩 몇 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지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아 얼마 남지 않은 케첩을 박박 긁어서 써버린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작 그날도 나지 않던 무신경한 햄버거 매장 크루에 대한 분노가 새삼 치솟아 올랐지만 이미 유통기한을 지난 일이었다. 케첩 제일 작은 병 정도라면 편의점에서 몇 백 원 정도 더 비싼 것으로 소위 '멍청 비용'을 지불했다고 퉁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웬걸. 물엿도 없었다. 그리 자주 쓰는 물건이 아니어서 다 썼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내 잘못이기는 했지만 이쯤에 와서는 정말 꾹꾹 누르고 있던 짜증이 있는 대로 폭발했다. 물론 이 짜증의 대부분은 '하루종일 집구석에 있으면서 그런 거 하나 안 챙겨본' 나 자신과, '지난 주에 마트에 쓴 돈이 얼만데 별것도 아닌 케첩이니 물엿 따위를 빼먹고 안 산' 나 자신과 '그냥 있는 콩나물국 가지고 대충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쏘야씩이나 해먹겠다고 나댄' 나 자신에 대한 짜증과 역정이 모두 포함된 것이기는 했다. 안 먹어. 안 먹어. 안 먹는다고. 괜한 신경질을 부리며 꺼내놨던 채소들을 죄다 다시 냉장고 야채칸에 처박았다.


혼자 산다는 것은 대개 이렇다. 내 반경 하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내가 그렇게 했거나 내가 미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니 그걸로는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다. 내가 밥을 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먹을 밥이 없다. 내가 빨래를 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갈아입을 옷이 없다. 유통기한이 턱없이 짧은 뭔가가 남아있는 것은 내가 챙겨 먹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물건을 살 때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여기서 더 짜증을 부리는 것은 그냥 내 얼굴에 침 뱉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케첩이야 그렇다 쳐도 물엿까지 가버리면 편의점에서 사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마침 오후에 먹을 요거트도 다 떨어져 가니 이 참에 그냥 마트나 다녀와야겠다고, 아직도 누구를 향한 짜증인지 알 수 없는 역정에 들끓는 나를 달래서 집을 나섰다. 식단까지 다 짜놓고 뭔가가 떨어져서 음식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가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고, 이런 걸 보면 그는 훌쩍 떠나버리고 나만 오도카니 이 집을 지키고 있는 게 맞구나 싶어서 새삼 좀 마음이 스산해지기도 한다.


마트 앞에 거의 다 왔을 무렵이었다. 이 시간에 그놈의 케첩을 사 가지고 집에 가서 언제 밥하고 언제 쏘야 볶고 언제 국 데워서 밥을 먹겠나 하고, 그냥 또 적당히 배짱 좋게 한 그릇 사 먹고 들어가기로 한다. 마침 이 근처에 일본식 라멘 집이 있다고 어디선가에서 봤던 기억이 났다. 마침 일식 라멘을 먹은 것도 꽤 오래전의 일이고, 나는 또 이 사람이 그냥 이 참에 오랜만에 라멘 한 그릇 사 먹으라고 이런 이벤트를 벌이는구나 하고 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주택가 한 구석에 있는 작은 가게 치고는 국물 맛이 상당히 깊었다. 그도 같이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케첩 하나 물엿 한 병에 기껏해야 요거트나 한 팩 정도 더 사려고 갔던 마트에서 나는 또 순식간에 이런저런 것을 카트에 쑤셔 담고 거뜬하게 배송 가능 금액을 넘기고는, 크래커 한 박스만을 손에 달랑달랑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나설 때의 온갖 분노와 짜증과 역정 따위는 싹 엿이나 바꿔먹은 행색으로. 나 잘했지? 이쯤 되면 그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을 성도 싶다. 참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내가 생각해도 걱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미 being 장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