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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0. 2024

은퇴는 참아주세요

-114

밥솥의 퍼포먼스가 수상해지기 시작한 지는 벌써 꽤 됐다. 그러잖아도 내솥이 많이 벗겨져서 교체용 내솥을 하나 사려고 알아보니 거짓말 좀 보태서 새 밥솥을 하나 사는 값이 나와서 이걸 도대체 어떡하나 하고 있던 참이다. 가끔 한 번씩 옆구리 쪽으로 김이 새기도 하고 밥맛도 어딘가 전만 못해서 이걸 도대체 어떡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가끔 머리가 아플 때가 있었다. 그래도 뭐, 일단은 그럭저럭 혼자 먹을 밥만큼은 만들어 주니 아쉬운 대로 못 본 척, 그렇게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는 취사 도중 김과 함께 밥물이 같이 몇 방울 튀어나오는 걸 보고 이거 도저히 안 되겠구나 싶어서 분리할 수 있는 부속은 죄다 분리해서 베이킹 소다에 식초를 풀어 한나절 남짓을 담가 놓았다가 칫솔에 철수세미까지 동원해 박박 문질러 닦았다.


가뜩이나 그가 떠나고 난 뒤로 집안의 물건들이 이것저것 말썽을 일으켜 하나씩 둘씩 바꾸고 있는 참이라 밥솥의 이상 징후는 상당한 스트레스 거리다. 제일 큰 문제는 밥솥이 생각보다 별로 싸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전기밥솥'으로 기준을 낮추면 훨씬 일은 쉬워진다. 그러나 다른 건 음식맛도 잘 모르는 주제에 밥맛에만은 이상하게 까다로운 나는 웬만해서 전기밥솥은 사고 싶지 않다. 매일 그때그때 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이틀에 한 번씩 밥을 해 한 번은 식은 밥을 먹어야 하는 처지라면 더더욱 이왕 하는 밥은 맛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제 작은 밥솥을 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내 막연한 거부감에도 있는 것 같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지만 아마도 내가 누군가와 함께 업 삼아 매일 같이 밥을 먹을 일은 생기지 않거나 최소한 당분간은 없을 것 같고, 그러니 내게는 지금 쓰는 6인용 밥솥도 사실은 용량 초과다. 요즘엔 3인용 작은 밥솥도 많이 나오던데 그런 걸 사면 딱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런 걸 사버리면 그야말로 이제 우리 집엔 나 혼자밖에 없다는 걸 못 박는 셈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아마도, 이미 바꾼 모니터나 텔레비전이나 진공청소기 등등에 비해 밥솥을 바꾸는 일에 내가 유독 소극적인 이유는 그런 탓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지금의 밥솥이 최대한, 조금이라도 오래 버텨주기를 바랄 수밖엔 없는 것 같다. 너 그동안 오래 고생한 건 알겠지만 처지가 이러니 은퇴는 조금만 미뤄달라고, 이제 더는 못하겠다는 노장 선수에게 팀 사정을 들먹이며 읍소하는 감독이 된 기분으로 박박 닦아서 하루 종일 햇빛에 바싹 말린 부속들을 원래대로 차곡차곡 다시 끼워 놓았다. 3인용 밥솥이 6인용에 비해 많이 싸면 결단을 내리기 좀 쉬웠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3인용이나 6인용이나 10인용이나 밥솥 가격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냥, 백 퍼센트 돈이 아까워서 그런 것이었으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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