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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1. 2024

맵찔이의 매운 라면

-115

나는 소위 말하는 '맵찔이'다. 원래는 맵찔이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매운 걸 잘 못 먹고 썩 좋아하지 않던 그의 손에 몇 년 밥을 얻어먹다 보니 그렇게 변했다. 매운맛을 고를 수 있는 식당에 가면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1단계였고 이런저런 재료를 가져다 떡볶이를 직접 끓여 먹을 수 있는 체인점에 갈 때는 고추 한 개 이상이 붙은 소스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매운 갈비찜으로 유명한 대구의 어느 갈비찜 집에 가서도 우리는 '순한 맛'을 시켰고, 그걸 먹는 내내 이 갈비찜은 매워야 맛있는 음식이며 그러나 우리한테는 그림의 떡이니 어쩌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리고 그런 주제에, 우리 집에는 언제나 상비로 라면이 순한 맛 한 종류와 매운맛 종류씩 두 가지가 구비되어 있다.


그게 뭐가 됐든, 얼마나 맵다든 일단 새로 나온 라면은 한 번은 사다가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탓도 없진 않다. 그래서 매운 라면을 사다가 끓여놓고 한 젓가락 먹을 때마다 코를 훌쩍거리며 무슨 라면이 이렇게 맵냐고, 한국사람들은 이상하게 음식 필요 이상으로 맵게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치즈 뿌려먹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혼자 투덜댄다. 어차피 나는 맵찔이고, 광고에서부터 이 라면 대단히 맵습니다 하고 들어오는 라면이라면 그냥 안 사는 게 쉽고 편한 길이었을 텐데도 그런 건 대개 내 안중에는 없다.


그렇게 '맛보기용'으로 한 개를 끓여 먹고 서너 개 남은 라면은, 그때부터 '저걸 어떡하면 좀 덜 맵고 맛있게 만들어서 먹을 것인가'를 놓고 온갖 고민을 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냥 계란을 하나 푸는 것이다. 제 아무리 매운 라면이라도 일단 계란이 하나 들어가는 순간 나 같은 맵찔이도 눈물 콧물 짜지 않고도 먹을 수 있을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다음이 치즈를 한 장 넣는 것이다. 그것 외에 몇 번 시도해 본 일명 시베리아식 라면, 그러니까 마요네즈를 듬뿍 푸는 것도 괘 효과는 좋은 편이었지만 이 라면에는 국물에 식은 밥을 말기가 꺼려진다는 나름의 단점이 있어서 끼니용으로는 썩 적절하지 못하다. 그 외의 방법은 뭔가 손도 많이 가고 넣어야 하는 것들도 이것저것 있어서 좀 일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아 가면서, 나는 매번 맵찔이 주제에 매운 라면을 떨어뜨리지 않고 한 팩씩은 꼭 산다.


아주 많이도 아니고 고작 몇 백 원 정도 할인하는 행사에 낚여서 사온 신상 라면이 대단히 매워서 어제도 한참이나 눈물콧물을 짜며 훌쩍거렸다. 맵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미각이 아닌 통각이고, 그래서 실은 혀와 입 점막이 느끼는 고통에 가까운 맛이라고 한다. 이런 걸 좋아하고 잘 먹는 분들이 좋아하는 거야 또 그럴 수 있다지만 나 같은 맵찔이조차도 왜 스스로 이런 고통을 자처하는지 모를 일이다. 순한 라면만 원패턴으로 사다 놓고 먹기에는 물리니까? 그런 이유도 없진 않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않을까. 그러게,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남의 입맛을 제멋대로 튜닝해 놔서 라면 하나 끓여 먹을 때마다 이 난리를 치게 만드냐고 그렇게 투덜거려 본다. 사실 원래도 나는 매운 걸 그리 썩 잘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럴 땐 또 가버린 사람 탓이 제맛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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