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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4. 2024

이따금은 지름길로 가고파

-118

아주 오랫동안,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노래의 한 부분이 머릿속을 뱅뱅 돌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 어제 오후쯤 갑작스레 떠오른 노래 하나가 그랬다. 오후 다섯 시쯤 되어서, 찬 커피나 한 잔 마셔야겠다 싶어 텀블러를 씻어 얼음을 채우고 비어버린 얼음틀에 물을 따르던 그 순간에 불쑥 생각난 그 노래는, 밑도 끝도 없는 후렴구의 어느 한 부분이었다. 이따금은 지름길로 가고파 그건 안될까. 뭐 그런 부분이었다. 앞 가사도, 뒤 가사도 생각나지 않았고, 오직 저 부분과 한 두 마디 뒤에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다소 맥 빠진 가사가 한 줄 더 붙어있던 것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그러나 말겠거니 했지만 이 뜬금없는 노래 한 구절은 저녁 늦게까지 계속 머릿속과 입 속을 맴맴 돌며 나를 괴롭혔다. 아, 안 되겠다. 결국 나는 포털 사이트의 검색창에 이 대략 난감한 가사 한 줄을 무조건 써넣고 검색 버튼을 눌렸다. 그리고 검색된 결과는 '보노보노'라는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한국어판 오프닝 가사였다. 그제야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마음속이 편안해졌고, 그리고 누가 가위로 싹둑 잘라간 듯 떠오르지 않던 노래 가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루룩 떠올랐다.


20여 년쯤 전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해 서울에 올라와 신림동 반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월급은 적고 일은 많고 몸은 힘들고 마음은 더 고됐다. 사는 게 왜 이런지,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건지, 내가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거나 아닌지 하는 불안감에 거의 매일을 울면서 잠들었다. 이 노래는 밤 열 시 가까운 시간, 그제야 퇴근을 하고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너무 조용한 방 안이 적막해서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나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당시에 나는 투니버스를 굉장히 열심히 봤다. 남들이 행복한 것을 보면 우울해졌고 남들이 불행한 것을 보면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은 일단 나와는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에 내게 그 어떤 질투도 좌절도 안겨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노보노'라는 이 애니메이션은, 보고 있자면 적당히 멍청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적당히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적당히 그래도 이만하면 살만한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기도 했던 고마운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러던 노래를, 내가 꽤나 오래 까맣게 잊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은 20년이나 지나갔고 그때의 그 철없던 아가씨는 이젠 어딜 가도 애기 엄마 소리를 듣는 훌륭한 아줌마가 되었다. 그러나 사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쉽지 않다. 사는 게 왜 이런지, 원래 이렇게 힘든 건지,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건지, 내가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거나 아닌지 하는 불안감은 아직도 여전하다. 저 때는 이런 기분이 들 때 전화를 해 징징거릴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나 혼자 뿐이니, 어떤 면에서는 그 시절보다 더 사정이 좋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기적이 일어나서 금방 마법처럼 행복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답은 바로 다음 가사에 나온다. 고생은 싫지만 어쩔 수 없다고. 살아있는 이상은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는 듯싶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서글프고, 어떤 면에서는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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