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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5. 2024

그래도 다 살아진다

-119

밤 11시쯤이 되면 전기장판을 켜 둔다. 가끔은 하던 일에 정신이 팔려 30분쯤 늦게 틀어놓을 때도 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데워진 전기장판 속으로 쏙 들어가 처박히는 기분은 그야말로 끝내준다는 말 이외의 다른 말로는 형용이 힘들 정도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지만 한참 날씨가 추울 때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아 따뜻해 하는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몇 번 연거푸 지르다가 전기장판 안 샀으면 올 겨울 어떻게 날 뻔했냐는 생각에 간만에 기특한 소비를 한 나 자신에게 셀프 칭찬도 몇 번이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맛을 칼로 무 자르듯 딱 잘라낼 엄두가 나지 않아 당초 3월 중순으로 예정되었던 전기장판의 올해 종무를 반 달 정도 뒤로 미룬 바가 있다.


어제도 오후 2시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존 탓에 딱히 잠도 오지 않고 해서 새벽 한 시가 훨씬 지나도록 책상에 붙어 앉아 하던 일을 했다. 아, 허리도 아프고 이젠 좀 누워야지. 길게 기지개를 켜고 이불을 들치고 눕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장판 켜놓는 것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한참을 궁시렁거리며 컨트롤러 쪽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나는 의외로 이불속이 그리 춥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잘까. 그 고민이 10여 초 이상이 걸렸을 리는 없다. 나는 날이 그리 춥지 않은 것을 핑계 삼아 그냥 자 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나는 아무런 문제없이 아주 거뜬하게, 잘 자고 무사히 잘 일어났다.


내심 그간 좀 더웠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면 어김없이 잠결에 차낸 이불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던 것이 오늘 아침에는 아주 얌전하게 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리가 과하게 따뜻하지 않은 탓인지 아침에 눈을 뜨고도 이불을 뿌리치고 일어나고 싶지 않아 허공에 대고 징징거리는 시간도 훨씬 줄었다. 아니 그 이전에, 그냥 이젠 전기장판을 굳이 켜지 않아도 밤에 잘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실감한다. 이제 정말로 반년 가까이 고생한 전기장판에게 나머지 반년의 휴식을 주어야 할 시기가 왔다고.


그러고 보니 벌써 3월의 마지막 주다. 어제 오후쯤 갑자기 푹하다는 생각이 들어 들여다본 핸드폰 화면의 수은주는 무려 20도를 가리키고 있어 기겁하다시피 놀랐던 생각도 난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서 봄꽃이 필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난 아마도, 올해 봄에도 거리마다 핀 봄꽃을 보고 그 화사함에 설레기보다는, 느닷없이 그를 떠나보내고 헤매 다니던 그 거리에 서럽도록 활짝 피어있던 그 꽃들이 생각나 올해도 조금은 우울하지 않을까도 싶다. 이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내 곁을 떠나간 지도, 이제 얼마 후면 꼭 2년째가 된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 내가 일견 대견하기도 하고 일견 구차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다 살아진다. 사랑이 떠나가도. 그 뒤에 혼자 남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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