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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27. 2024

가끔은 고개를 숙여도

-121

현재 그의 책상에는 미니 거배라가 열 송이 정도 꽂혀 있다. 지난 화이트데이 무렵에 샀던 장미는 열흘 정도를 버티고 하나둘씩 수명을 다해 질기게 살아남은 서너 송이는 내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임인 셈이다.


잠깐 집을 비웠던 지난여름의 서너 달을 제외하고 거의 2년 가까이 이런저런 꽃을 사다가 그의 책상에 꽂아본 바 터득한 몇 가지 사실이 있다. 대개 오래가는 꽃은 줄기부터가 단단하고, 반대로 줄기가 약하고 힘이 없는 꽃들은 대개 오래가지 못한다. 전자의 좋은 예로는 오래가는 꽃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소국이 있고, 장미나 카네이션 등등도 비교적 줄기가 단단한 편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반대로 줄기가 약하고 쉽게 무르는 꽃이라고 한다면 스토크라든가 프리지아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사실은 거베라도 후자 쪽에 속하는 꽃이긴 하다.


거베라가 온 지 이틀 정도가 겨우 지났을 때였다. 그중 두 송이가 표가 나게 줄기가 쳐져서 마치 할미꽃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만져보니 줄기의 중간 정도부터 힘이 빠져서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아니 얘네는 왜 새로 사다 꽂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러지 하는 생각에 조금 언짢아졌다.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책상에 시든 꽃을 두지 않는다는 내 원칙은 나름 철저한 편이어서 원래라면 허리가 굽어버린 거베라는 그 즉시 뽑아서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틀밖에 안 된 꽃을 버리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두 녀석의 꽃대를 한 뼘쯤 좀 더 길게 잘라내고는 내 책상에 꽂혀있는 징미들 옆으로 옮겨 꽂았다. 여기서 하루이틀 정도 더 보고, 그래도 안 되겠으면 버릴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반쯤은 포기하듯 꽂아두었던 거베라 두 송이는 흐물거렸던 줄기에 도로 힘이 들어가 꼿꼿해져서 지금까지도 잘 살아있다.


한번 시들어버린 꽃은 무슨 짓을 해도 다시 살릴 수 없다는, 나름의 불가역성을 믿고 있던 터라 분명 제 얼굴을 못 가눌 정도로 흐물거렸으면서 다시 버티고 일어난 그 거베라는 내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간 그런 식으로, 조금만 시드는 기미를 보여도 가차 없이 잘라서 내다 버린 꽃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 정도는 더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그게 뭐든, 사람이든 꽃이든, 한 번 고개를 숙인 걸로 꺾이는 건 역시 너무 억울한 일인 게 맞구나 하는 생각도 한다.


대충 5월 언저리로 미뤄놓은 몇 가지 일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연일 한숨부터 나오는 나날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 투성이에 도대체 사는 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를 한숨이 나오지만, 그래도 조금 더 힘을 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하다 못해 흙에 제대로 심겨 있는 것도 아니고 잘라져 물에 꽂혀 있는 꽃들조차도 저렇게 힘을 내는데, 그래도 나는 명색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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