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몰래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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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가끔 이상하리만큼 가사가 좋은 노래가 있다. 한 30년쯤 전에 나온 '몰래한 사랑'이라는 노래도 그랬다. 소위 '어른들이 듣는 노래'인 이 노래는, 다분히 구성진 멜로디와 창법에도 불구하고 곱씹어보면 매우 서정적인 가사를 가지고 있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가 익어가는 날에도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에 쓸만한 식물이나 꽃은 굉장히 많을 것 같다. 실제로 얼핏만 생각해도 목련이나 라일락이나 프리지아나 포플러 나무 등등의 꽃과 식물들이 유명한 노래 가사들에 쓰였다. 그런데 하필 '무화과'다. 보기 좋은 예쁜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좋은 향이 나는 것도 아닌 무화과. 이 노래 가사 어딘가 좀 특이하다고 처음 생각했던 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는 이 노래의 가사가 원래 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 어쩐지.


그리고 그가 내 곁에서 떠나간 후에야 나는 그의 '탄생화'가 무화과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천성이 곰살맞지 못한 사람이어서 식물 같은 걸 잘 키우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집에 무화과나무를 키우고 싶다는 열병 비슷한 욕구에 시달렸다. 그러나 심지어 그의 탄생화이기까지 한 이 나무를 덜컥 집에 들였다가 나의 부주의와 사려 깊지 못함으로 죽이고 나면 그 후에 내가 겪을 상심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검색되는 무화과나무들은 대개가 사람만큼 키가 큰 나무들이었다. 손바닥만 한 다육이 화분 하나도 애면글면하며 키우고 있는 내가 과연 저런 나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며칠 전 나는 너 이런 거 찾고 있지? 하는 듯 내 앞에 30 센티 정도의 작은 무화과나무를 들이미는 AI의 영험함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결제를 끝낸 후였고, 주문을 한 지 만 30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꽁꽁 포장된 무화과나무가 집 앞에 와 있었다. 나는 혹시나 화분을 엎지르거나 이파리가 상할까 봐 덜덜 떨며 몇 겹으로 싼 포장을 풀고 그 조그만 무화과나무를 창가 볕 제일 잘 드는 자리에 모셔놓았다. '받자마자 물을 흠뻑 주라'는 판매자님의 메시지에 따라 화분받침에 넘칠 만큼 물을 주고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 태초의 인간이 제 몸을 가리는 데 썼다는 이 오래된 식물의 이파리를 한참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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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는 뿌리의 3분의 1만 살아있어도 물을 주면 다시 싹을 틔우는, 생명력이 아주 강한 나무라고 한다. 도낏자루로 3년을 써도 땅에 꽂고 물을 주면 싹이 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볕을 잘 쬐어주고, 물을 듬뿍 주고 겨울에 안으로 들여주면 알아서 겨울을 잘 나는 나무라고 하니 그 말만 믿고, 그가 곁에 있을 때 한 번도 사 주지 못했던 그의 탄생화를 나름의 애정을 다 해 키워볼 생각이다. 꿈속에서라도 그 그늘에 숨어 앉아 지난날을 생각하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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