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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우 즉흥적인 사람이다. 나는 계획을 세우는 데 익숙하지도 않고 그 계획들을 잘 지키는 편도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가장 곤혹스러운 방학 숙제는 독후감이나 일기가 아니라 '계획표'를 짜서 내는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이 일곱 시일 수도 있고 여덟 시일 수도 있고, 점심을 먹는 시간이 열두 시일 수도 있고 한 시일 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 두 시간일 수도 있고 세 시간일 수도 있는데 그걸 획일화된 계획표에 욱여넣으라는 말 자체가 내게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그 정해놓은 계획표를 지키지 못하면 필수적으로 느껴야 하는 알 수 없는 죄책감도 싫었다. 그러던 어린이는 나이를 먹고 인생은 어차피 임기응변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는 한동안은 내게 일정 관리 좀 하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다름을 인정한 것이었겠지만 어쩌면 포기나 체념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지금에서야 생각한다. 그렇게 매사가 제멋대로인 나와는 달리 그는 매우 정갈하고 꼼꼼한 사람이었다. 그는 매일 포털의 캘린더 서비스에 그날 할 일과 그날 먹을 것들, 심지어는 그날 봐야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심지어 재방송까지!)을 체크했다. 그러나 사람의 사는 일이란 그렇게 쉽고 단순하지 않아서 그의 일정은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에 의해 어그러지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그는 일일이 그 일정을 수정했다. 일정이란 도미노와 같아서 하나가 어그러지면 그에 따라 순차적으로 모든 일정이 엉망이 되는 속성이 있다. 그의 캘린더 수정 작업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내심 저렇게 피곤한 짓을 왜 할까, 하고 생각했다.
요즘 나는 아침에 일어나 화분을 볕 잘 드는 창가에 내놓고 침대를 정리하고 청소를 한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아침 운동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브런치에 글을 한 타래 쓴다. 사이사이 꽃병에 물을 갈아준다든가 가습기를 청소한다든가 하는 자잘한 일들이 끼어 있다. 점심때가 되면 밥을 챙겨 먹고, 저녁 6시쯤이 되면 그날 분의 펜글씨를 쓴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어제 며칠을 벼르던 태블릿 pc를 하나 질렀다. 그걸로, 오늘부터는 자기 전 한 시간씩 뭔가를 그리는 연습을 해볼 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가 그랬듯 나의 캘린더에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그가 저 위에서 내가 하는 짓을 본다면 네가 캘린더를 쓴다니 웬일이냐고 놀랄 것이다.
내가 이런 번잡한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나의 하루가 너무나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거의 전부를 공유하던 사람이 예고 없이 빠져나가버린 공간은 너무나 커서 마치 블랙홀처럼 내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블랙홀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온갖 것에 마음을 쓰고 신경을 분산하며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 커서 내 모든 우주를 다 쏟아부어도 아직은 메울 수가 없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는 그런 말이 나온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이 별의 내부에서 합성되었으므로 우리 모두는 별의 자녀들이라고.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블랙홀이란 수명을 다한 별이 중력에 의해 수축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내 곁에 살던 하나의 우주가 수명을 다했고, 나의 모든 것이 그리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