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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2. 2024

그럴 줄 알았다니까

-157

'애매하게 쉬는 날'이어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은 날이 며칠 있다. 대표적으로 어제 같은 '근로자의 날'이 그렇다. 분명 법정 공휴일이라고 하지만 그날 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쉬는 날이라곤 하는데 별로 쉬는 날 같지는 않고 그런 주제에 이런저런 일을 보기도 애매한, 그런 어정쩡한 날로 그렇게 여겨지는 모양이다.


날이 그런 날이었던지라, 예의 '이번 달 안애 결판을 내야 할' 일에 관련해 도대체 뭘 어떡할 생각이냐는 연락이 온 것은 별로 놀랍지도 않고 어느 정도는 그럼직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전화를 걸기에 앞서 그의 사진 액자에 눈을 맞추고 잠깐 빌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은 먹고 죽어도 없고, 그런 이상 시간을 버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거기 간 짬밥이 얼마 안 돼 이 일을 근원부터 해결할 깨끗한 방법을 내 손에 떡하니 쥐어주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시간 좀 달라고 하는 것쯤은 해줄 수 있지 않냐고. 나 당신만 믿고 전화한다? 그렇게 반 협박에 가까운 말 한마디를 해놓고, 크게 숨을 들이쉬고 전화를 걸었다. 제 사정이 이만저만하고, 그래서 죄송하지만 올해 가을 정도까지는 말미를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담담하게 했다. 당연히 좋은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흔쾌하게 상대방 측에서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어안이 벙벙했다. 지난 한 달간 그 일로 만만찮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지라 더 그랬다. 이야. 당신 정말 영험하다고, 한참이나 그의 액자 앞에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갑작스러운 졸음이 쏟아져서 때아닌 낮잠을 30분쯤 잤다. 그리고 일어나 잠시 멍해 있었다. 물론 일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잠시 미루어졌을 뿐이라, 나는 또 그 몇 달의 시간 동안 이 일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오헨리의 단편소설에도 나오지 않던가. 아들이 짝사랑하는 아가씨의 '시간'을 사기 위해 뉴욕의 모든 도로에 교통체증을 일으킨 아버지의 부성애가. 나는 그 소설에 나오는 백지 수표를 쓰지 않고도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을 벌었으니 오늘만은 그가 그 단편소설에 나오는 돈 많은 아버지보다 훨씬 더 능력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얼굴을 마주 보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들으며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는 이런 식으로 내 곁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가끔 있다. 어제도 그랬다. 지난달에, 나름 봉안당 열심히 쫓아다니며 제사 챙기고 생일 챙겼던 게 그래도 조금은 고마웠던 모양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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