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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5. 2024

라면이 다 라면이긴 한데

-160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버릇처럼 라면 카테고리에 가서 한번 죽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대개는 한 팩 정도를 산다. 그것은 정말로 라면이 떨어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름을 처음 듣는 신상 라면이 눈에 띄면 일단은 불문곡직 한 번 먹어는 보는 편이다. 라면은 일단 내 뻔하디 뻔한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좀 색다른 라면이 하나 나왔다는 것은 그 뻔한 식단을 조금이나마 다양하게 만드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새 라면을 사 오면 처음엔 무조건 아무것도 넣지 않고, 계량컵까지 동원해 봉지 뒷면에 적힌 조리법대로 정확하게 끓여서 맛을 본다. 가끔 예능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것처럼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도 라면 맛을 가려내는 달인도 아닌 주제에 이런 답지 않은 짓을 하는 이유는 이 라면이 뭔가를 추가로 넣어야만 먹을 수 있는 라면인지 아닌지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계란이나 치즈 등을 추가로 넣어야만 먹을 수 있는 매운 라면인지 아니면 라면 하나만 달랑 끓여도 대충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맵찔이용 라면인지에 대한 판가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가격에 비해 딱히 특이한 점이 없거나 더 저렴한 몇몇 우리 집 스테디셀러 라면에 비해 특별히 맛있지 않다고 판단되는 라면은 그 한 팩을 다 먹고는 웬만해서 다시 사지 않는다.


며칠 전에도 대충 그런 루트로 처음 보는 라면 한 팩을 샀다. 이름으로 봐서는 꽤 매울 것 같은 느낌이어서 나름 긴장했지만 하나를 디폴트로 끓여서 먹어본 결과 그렇게까지 맵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매운 것을 좋아하고 매운 것을 잘 먹는 자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매운 라면보다 안 매운 라면의 라인업이 훨씬 빈약한 것이 사실이고, 심지어는 그 와중에 남들은 하나도 안 맵다는 라면조차도 내 입에는 매울 때가 있으니 이런 내가 먹어도 그럭저럭 많이 맵지 않은 이런 라면은 상당히 드문 것이 사실이어서 '심봤다'라도 외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맵지 않은' 것을 세일링 포인트로 잡은 몇몇 라면들에 비하면 살짝 맵긴 했지만 치즈나 계란을 넣지 않고는 먹기가 괴로울 만큼 맵지는 않은 정도여서 그 점이 또한 나름 좋았다.


그는 라면을 끓일 때 뭘 하도 이것저것 많이 넣고 끓여서 정작 베이스로 무슨 라면을 넣고 끓였는가는 결과물만 먹어보고는 알아채기가 어려운 적도 많았다. 그래서 그의 라면 고르는 기준은 매우냐 안 매우냐가 아니라 무조건 제일 싼 라면이었다. 이걸 사나 저걸 사나, 결국 넣을 수 있는 건 몽땅 다 넣은 호화판 라면을 만들어서 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보기에, 거기서 거기까지인 라면을 두고 이게 조금 덜 맵고 이게 조금 더 맵고를 따지고 앉아있는 내 꼴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하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라면 한 봉지 끓일 때 온갖 야채 다 넣고 푸짐하게 끓이는 것도 하던 사람이나 하지 나 같은 게을러터진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 내가 내놓을 변명이라고는 그게 고작이지 싶다. 근데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라면은 밥 하기 귀찮을 때 대충 끓여서 한 끼 먹는 용도로 만들어진 음식인 게 맞지 않냐는 말도 같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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