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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7. 2024

29년 후엔

-162

나는 그를 정확히 29년 전에 처음 만났다. 물론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그와 내가 불과 몇 달 후에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을 줄도 몰랐고 몇 년 후엔 평생을 같이하는 사이가 될 것도 몰랐고 27년 후엔 그가 더 이상 내 곁에 있어주지 않을 것도 몰랐다. 남들에 비해 딱히 그렇게 오래 산 것 같지도 않은 내 인생에도 이런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싶은 순간이 생기는구나 하는 기묘한 감상이 있다.


달이 바뀌었고, 그렇지 않아도 달 바뀐 인사를 하러 가야 할 참인데 마침 오늘이 날이라, 5월 인사는 오늘 가는 것으로 퉁치려고 한다. 금요일까지는 그렇게 좋던 날이 토요일 들어 후려지기 시작하더니 일월 양일간 참 알차게도 비가 왔다. 그러더니 오늘까지도 가느다란 실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오전 중엔 그치긴 할 모양이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참, 점지해 달라는 로또 번호는 한 장 안 주면서 이런 건 신경 오지게도 써주는구나, 하고 입술을 좀 삐죽거려 본다. 그나마도 안 해주면 어떡할 거냐고 물으면 뭐 할 말은 없지만서도.


이제 내년이면 내 나이는 그가 나를 떠난 나이와 같아진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은 나이를 먹지 않는 그보다 내가 나이가 많아지게 되는 셈이다. 작년에 20년 만에 개봉한 슬램덩크를 보면서 나는 이렇게나 때 묻고 나이 든 시시한 어른이 되었는데 쟤네들은 참 아직도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청춘이구나 하는 생각에 묘하게 가슴이 아려왔던 기억도 있다. 나는 점점 나이를 먹어갈 테고, 흰머리가 늘어나고 얼굴의 주름도 늘어나고 급기야는 허리도 굽고 기력도 쇠해갈 테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50이 채 안 된 그 나이 그대로 남아있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하기 따라 서글프기도 하고 좀 아련하기도 하다.


29년 전에 나는 그를 처음 만났는데, 지금부터 29년쯤 후엔 다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고 요즘은 세월이 너무 좋아 그러기에는 조금 시간이 촉박할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기분이다. 그게 언제가 됐든 다시 만날 날까지, 당신도 나도 각자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해 보자고, 오늘 가서 그렇게만 말하고 돌아오고 싶지만 아마 난 또 오늘도 그의 앞에 가서 사는 거 힘들어 죽겠으니 날 좀 빨리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뭔가 좋은 방법 좀 가르쳐 달라고 징징거리고 오지 않을까도 싶다. 나는 당신이 나를 최소한 한 50년쯤은 키워줄 줄 알았는데 고작 그 반만 키우고 도망가버려서, 난 아직도 내가 예상한 것의 절반 정도밖에 못 커서 그렇다는 변명과 함께.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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