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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8. 2024

우산 젖는 게 싫어서

-163

자그마치 일본으로 국제소포를 보낼 일이 있었다. 때마침 그의 봉안당에 가야 할 날이기도 해서, 연휴가 딱 지나고 난 어제 부치는 것이 적당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어지간하면 우체국엔 가지 않는 편이기는 했지만 어제 안 가면 오늘 또 나가야 할 참이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이 버스로 세 정거장도 넘게 떨어져 있는 터라 그걸 또 나올 엄두도 나지 않아서, 일단 한 번 나오면 볼 수 있는 모든 볼일을 다 본다는 집순이의 일반적인 패턴에 따라 그냥 우체국에 들렀다 봉안당에 가기로 했다.


분명히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서 타도 되는 버스 노선을 검색했다. 그리고 거기에 나온 버스를 탔다. 그러나 잠깐 멍해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는 엉뚱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기겁을 해서, 카드를 한 장만 대 달라고 연신 빽빽대는 하차 단말기에 식은땀을 흘려가며 겨우 뛰어내리듯 버스에서 내렸다. 엉뚱한 길로 접어들긴 했지만 아주 멀리는 오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내가 내린 곳에서 우체국까지는 어찌어찌 걸어가려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냥 걷기 시작했다. 거기서 우체국 앞으로 가는 버스가 서는 정류장까지도 적지 않은 거리를 걸어야 했고, 그럴 거면 차라리 걷자 싶은 생각이었다. 문제는 비가 아주 딱 그치진 않고 조금씩이나마 계속 오긴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방 속에는 분명 우산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오지도 않는 이 비에 굳이 우산을 꺼내서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냥 나는 그 실비 속을 우산도 쓰지 않고 걸었다. 그런 걸 두고 딱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하는 거던지, 그렇게 버스 한 정거장 남짓을 미련스레 걸어간 내 몰골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옷은 스물스물 젖어 눅눅해졌고 머리는 마치 소가 핥은 것마냥 두피에 찰싹 달라붙어 반질반질 윤까지 나고 있었다. 가까스로 부칠 소포를 부치고 내 꼴을 돌아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왔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은 거라면야 또 어쩔 수 없겠지만 뻔히 가방 안에 우산을 두고도 우산 비 맞히기 싫어서 이 꼴이 되다니. 이쯤 되면 내가 우산의 주인인지 우산이 내 주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는 아니었고, 그래서 젖은 옷도 머리도 봉안당으로 가는 버스를 내릴 때쯤엔 얼추 말라 있긴 했다. 그래도 '우산에 비 맞히기 싫어서 내가 대신 비를 맞은' 그 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가는 날이라고 오던 비 그치게 해주는 것 말고 로또 번호라도 한 장 내놔보라던 내 어제 글에서의 땡깡에 그가 이런 식으로 대꾸한 게 아닌가도 싶다. 우산은 쓰라고 있는 것이고 갖고 나간 우산 비 안 맞혀 들고 온다고 누가 잘했다 칭찬 한 마디 할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렇게 미련하냐고. 그러게 말이다. 나 정말 왜 이렇게 미련한지 모르겠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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