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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09. 2024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164

그저께 봉안당에 다녀온 날은 밥만 해서, 설렁탕을 끓여서 먹었다. 이 설렁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의 생일날 먹으려고 산 미역국에 원 플러스 원으로 붙어온 녀석이니 아주 알차게 써먹은 셈이다. 빨라도 왕복 세 시간 이상이 걸리는 그 길은 갔다 오는 것만 해도 상당히 체력을 소모하는 느낌이 있어서 아침에 미리 예약 취사를 걸어둔 밥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설렁탕을 곁들여 한 끼를 먹어치운 것은 꽤 좋은 선택이었다.


문제는 어제였다. 밥통 속에 식은 밥이 남아있고, 어떻게든 이걸 먹어 없애야 할 참이었다. 며칠 비가 온 덕분에 온도가 좀 내려가긴 했지만 이미 날씨는 많이 수상해지고 있는 중이고, 이런 날에 밥통 속에 밥을 하루 이상 놔두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일 것 같지 않았다. 오늘도 라면을 먹나. 갑자기 좀 싫었다. 그렇다고 뭘 굳이굳이 꺼내서 썰고 볶고 하는 것도 마뜩잖았다. 이럴 때 만만한 것은 그저 리조또겠지만 그러기에는 생크림도 없고 우유도 없고 베이컨도 없다. 그리고 며칠 전 드디어 다 먹어치운 덕분에 그 흔해빠진 슬라이스 치즈 한 장 없다. 이래 가지고서야 리조또는 틀렸고.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불쑥 떠오른 음식이 한 가지 있었다. 리조또는 리조또인데, 내가 자주 해 먹는 크림 리조또 말고 토마토 리조또.


아, 그거 괜찮겠다. 순식간에 입맛이 확 돌았다. 나는 조금 전까지 내가 나 하나 거둬 먹이는 것이 왜 이렇게 귀찮으냐고 널브러져 있던 것이 무색하게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쏜살같이 마트로 튀어가서 베이컨과 슬라이스 치즈 한 팩과 파스타용 토마토소스 한 병을 사 왔다. 생 토마토도 넣으면 더 좋았겠지만 남은 토마토를 챙겨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생략했다. 토마토소스는 때마침 2천5백 원에 떨이하는 제품이 있어서 그것도 제격이었다. 그렇게 싸들고 온 것들을 주방에 부려놓고, 불과 조금 전까지 써는 것도 귀찮고 볶는 것도 귀찮다던 태도는 순식간에 갖다 버리고는 양파를 썰고 베이컨을 썰고 표고버섯을 썰고 집에 한 줌 남아있던 비엔나도 썰어서 마늘을 넣은 올리브유에 볶고 화이트와인을 두르고 찬밥을 볶고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케첩을 둘러 적당히 볶아 리조또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마지막엔 치즈도 한 장 얹었다. 파슬리 한 꼬집을 뿌리고 자리로 가져와 한술 먹어보니 뭐 이 정도면 크게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늘 먹던 뻔하지 않은 한 끼여서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혼자 밥을 챙겨 먹기 시작한 지 어언 2년, 밥 하는 잔재주가 조금은 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 저 리조또는 별도의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고, 늘 만들던 크림 리조또 만드는 방식을 조금 바꿔서 나름 혼자 만들어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끼를 잘 먹고 치우긴 했지만 써는 것도 귀찮고 볶는 것도 귀찮다고 징징거리던 것 치고는 써는 것 볶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마트까지 다녀오기까지 했으니 퍽 머쓱해지는 순간이긴 했다. 그래도 그라면 아마 잘했다고 할 거다. 먹고 싶은 건 어떻게든 먹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100그램에 만 원이 넘어가는 한우 꽃등심도 아니고 밤새도록 불 앞을 지키고 앉아 끓여야 하는 도가니탕 같은 것도 아니고 그까짓 토마토 리조또, 먹고 싶으면 먹어야 된다고 그라면 분명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하듯이 칭찬 스티커 같은 거라도 하나 붙여줄지도 모른다. 내 눈에는 띄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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