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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11. 2024

귀찮은데 관두자

-166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아 날씨 좋다 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했다.


괜히 마음이 뒤숭숭해지기 시작한 건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자고 일어난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간단한 아침 청소를 하고 꽃병에 물을 갈고 홈트까지를 마친 후 책상에 앉아 고거 조금 움직였다고 난 땀을 식히며 두유 한 팩을 마시는 내내 뭔가 마음이 술렁거렸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심지어 오늘은 불금인데.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까. 뭐 물론 딱히 정패진 목적지도 없고 나갈 볼일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집 안에 앉아 늘 들여다보는 모니터나 들여다보며 워드 문서 따위와 씨름하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자고 마음만 먹으면야 볼일쯤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 비근한 예로 집 근처 마트에나 바지런히 다니느라 본의 아니게 발 끊은 지 한참 된, 버스 몇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대기업 마트가 한 군데 있고 그 마트에서 한 정거장 정도만 걸어가면 꽤 규모가 큰 복합 쇼핑몰도 있다. 그 두 군데만 들렀다 와도 오늘 오후 정도는 충분히 때우고도 남을 것이다. 아니면 오랜만에 만화카페 같은 데나 가서 만화책이나 실컷 보다 올까. 이것도 그럴싸해 보였다. 대번 머릿속에 제목 정도나 아는 '요즘 인기 있다는' 몇몇 만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그중 몇 가지는 꽤 진지하게 읽어볼까 싶기도 하던 참이라, 한 2만 원 정도 쓸 각오를 하고 만화책이나 실컷 보고 밥 한 끼 사 먹고 그러고 들어올까. 그것도 뭐 그리 나쁜 생각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근 한 시간 정도를, 나는 딱히 오라는 사람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도 어떻게든 집 밖에 나가 뭐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 안절부절못하며 어딜 가서 뭘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트에 가자니 다음 주쯤엔 어차피 장을 한 번 봐야 할 텐데, 오늘 마트에 가서 괜히 또 이것저것 집어오게 되면 다음 주에 사야 할 물건 리스트에 이런저런 변동이 생기게 될 것이 탐탁지 않았다. 마트라는 곳은, 지금껏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가서 구경만 하고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안 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나이에 '젊은 애들'이나 가는 만화카페 구석자리를 차고앉아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는 것도 생각만큼 그렇게 선뜻 발이 떨어지진 않았다. 그가 있었으면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 혼자서는 조금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김이 한 번 새 버리고 나니, 불과 몇 분 전까지 나가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던 흥은 바람 빠진 비치볼처럼 쭈그러들어 버렸다. 에이, 말자. 귀찮다. 나는 맥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가봐야 돈이나 쓰고, 쓸데없는 거나 사다 나르겠지 뭐. 그냥 집에서 점심이나 대충 한 끼 해서 먹고 하던 일이나 하자고, 그렇게 나는 맥 빠지게 나 스스로와 타협해 버렸다. 하루종일 날씨는 화창했고 그림 같은 비행운이 진 하늘은 새파랬다. 그러나 그렇게 한 번 김이 새 버리고 나니 그 풍경들이 더는 설레지 않아서, 그것도 참 신기했다.


귀찮다. 그냥 그 한 마디만으로도 들뜨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식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그런 생각에 씁쓸했다. 어느 5월의 좋은 금요일에.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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