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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12. 2024

작약을 사기로 했다

-167

어디까지나 나의 편견인데, 장미는 꽃의 색깔에 따라 수명이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색깔이 연한 장미일수록 빨리 시드는 것 같다. 꽤나 다종다양한 장미를 사다 꽂아봤지만 똑같은 날 사 와서 똑같이 물올림을 하고 똑같은 꽃병에 똑같이 꽂아놔도 색깔이 연한 장미가 먼저 목이 꺾이거나 꽃잎이 떨어진다. 그래서 짙은 붉은 장미가 제일 오래가고 흰색이나 크림색, 연한 핑크색 장미일수록 빨리 시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부연해 두지만 이것은 꽃이라고는 일체 모르는 문외한의 편견 가득한 말일뿐이니 절대 곧이곧대로 들으시는 독자님은 계시지 않기를 바란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해 받은 장미는 총 열 대였는데 다섯 대는 흰색, 다섯 대는 빨간색에 가까운 짙은 분홍색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먼저 시들기 시작한 것은 흰 장미였다. 소생의 가능성이 없을 만큼 시든 것부터 한 송이씩 뽑아서 버리고 나니 이제 꽃병에는 분홍색 장미 다섯 대만이 남았다. 이쯤 되면 이제 후임을 구해야 한다. 흰 장미가 다 시들었다는 말은 이제 남아있는 분홍색 장미도 조만간 시들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며, 실제로도 꽃 중앙 부분의 색깔이 처음 사 왔을 때보다 확연히 짙어진 것이 슬슬 시들어가기 시작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다음엔 또 무슨 꽃을 사볼까. 겨울이 지나고 나니 살 수 있는 꽃의 구색이 많아져서 그것 하나는 좋긴 하다. 지금만 해도 철이 철이니만큼 카네이션부터 수국, 거베라, 스타티스, 알스트로메리아 등 몇 가지 꽃들이 우후죽순 나와 있었다. 지금 있는 장미를 빼고 뭘 좀 사다가 꽂아볼까 하고 한참이나 화면을 스크롤해 내리다가 나는 작약이 나와있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작약은 딱 한 번 사다 꽂아본 적이 있다. 사 온 지 한나절만에 구름같이 피어나는 그 자태에 반했고 그러던 꽃이 늙어버린 미인처럼 꽃잎이 새하얗게 변해 시드는 모습에 좀 충격을 받기도 했다. 그의 책상에 꽂아놓은 수십 가지의 꽃들 중에서도 작약의 최후는 단연 손에 꼽힐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걸 또 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살짝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드는 모습이 충격적이었던 만큼 작약은 피어있는 며칠 내내 내게 경탄과 기쁨을 주기도 했었다. 세상에,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는 꽃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몇 번이고 일부러 그의 책상 앞에 가서 한참이나 그 꽃을 보고 왔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좀 용기를 내서, 작약을 사기로 했다.


이번에 주문한 작약은 내주 주말쯤에나 집에 올 것 같다. 부디 그때까지 남아있는 장미가 힘을 내주기를 바랄 수밖에. 그리고 그렇게 온 작약이 이번에는 제 수명을 다하고 좀 편안하고 평화롭게 질 수 있기를. 아, 그리고 이번에 안 사실이지만 '함박웃음을 짓는다'고 할 때의 그 '함박(꽃)'이 작약의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작약이 그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내게도 함박웃음을 지을 일이 많이 생기기를, 덩달아 그렇게 소원해 본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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