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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18. 2024

슬픈 노래 한 곡 들려주오

-173

어제는 원래 식단상 사다 놓은 물만두나 좀 넣고 끓인 만둣국을 먹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덕이 도져서, 마트에 가서 감자 몇 알을 사 와서 하이라이스를 끓였다. 카레나 하이라이스는 일단 한 번 끓여두면 세 번 정도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들이는 노력 대 성능비가 썩 훌륭한 편인 메뉴다. 어차피 냉동실에 넣어둔 물만두가 어디로 도망가진 않을 테니, 언젠가 먹을 것 마땅치 않은 날 먹으면 되겠지. 뭐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감자를 사서 마트에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참 하늘은 파랗고 날씨는 적당하고 햇살은 좋은 봄날이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혼선을 빚은 라디오처럼, 뜬금없이 그런 노래 한 구절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슬픈 노래 한 곡 들려주오 청춘은 길기만 한데


딱 저 한 소절뿐이었다. 저 부분이 도입부인지 사비인지 뭔지도 모르는 채로. 앞에, 혹은 뒤에 무슨 가사가 있었는지도 깜깜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밑도 끝도 없이 한 줄만 달랑 생각나는 노래는 또 처음이어서 나는 이게 실제로 있는 노래이긴 한지가 좀 의심스러워졌다. 물론 내 머릿속에서 멋대로 만들어낸 가사며 멜로디라기에는 상당히 그럴듯해서, 어딘가에 있는 노래이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 노래는 점심을 다 먹고 설거지를 마치는 동안까지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내 머릿속을 빙빙 돌며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검색창에 저 불확실한 가사 한 줄을 쳐보기로 했다.


이 노래는 무려 1984년에 발표된 이은하 님의 '청춘'이라는 노래였다. 그 무렵 나는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고 저런 어른스러운 노래를 듣고 알 정도로 많은 나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 이 노래를 주워듣고 이렇게나 저 한 부분이 또렷이 기억나는 것일까.


이왕 찾은 김에 전곡을 한 번 들어보기로 했다. 이은하라고 하면 뭔가 쿵짝쿵짝하는 신나는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로 막연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노래는 시작부터 클래식 같은 정갈한 전주가 깔리고 조용히 읊조리듯 노래하는 창법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기억하던 그 부분은 도입부였다. '바람소리 낡은 창가에 한숨 소리처럼 깊기만 한데 누워도 마음은 동산에 뛰노네' 하는 부분에 가서는 와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알고 보니 이 곡 작사 작곡을 김창완 님이 하셨다는 모양이다. 어쩐지 싶은 마음에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무슨 화석 발굴하듯 '발굴'해 낸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어제는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듣고 듣고 또 듣고 있었다.


멀리 간 사람 말이 없고 지나간 시절은 물 따라가고
홀로 남아 발길 돌릴 수 없구나


정말로 나이 먹나 보다. 이런 옛날 노래가 좋은 걸 보니.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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