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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1. 2024

나는 안 매운 라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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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매운 라면이 좋다.


라면을 끓일 때, 끓는 물에 스프를 타는 순간 훅 끼치는 매운 냄새에 이미 거기서부터 몇 번 재채기를 하고 들어가야 하는 라면들이 있다. 나로서는 이미 첫 합을 겨뤄 보기도 전에 한 수 접히고 들어가는 셈이다. 이런 라면들은 결국 먹는 내내 '아 맵다'는 말을 연발하며, 몇 젓가락 건져먹을 때마다 급하게 이는 불길에 물이라도 끼얹는 기분으로 물을 마셔가며 그렇게 먹어야 한다. 면을 다 건져먹고 찬밥을 만 후에도 마찬가지다. 늘 하는 말이지만 매운맛은 맛이 아니라 통증의 일종이다. 그렇게 된통 시달린 입 속의 점막은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난 후까지도 가라앉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루에 겨우 한 끼 먹는 밥을 이런 식으로 먹어야 한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안 매운 라면이 좋다. 계란을, 치즈를, 숙주를, 혹은 기타 등등의 이런저런 재료를 넣어 가며 매운맛을 '죽여야만'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매운 라면이 아니라, 그냥 끓는 맹물에 달랑 스프만 넣고 끓여도 아무런 부담 없이 한 그릇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안 매운 라면이 좋다. 라면이란 자고로 물을 끓일 수 있는 불과 500밀리 남짓한 물과 냄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5분 안에 만들 수 있는 음식이라는 데 메리트가 있다. 다른 부재료를 이것저것 더 넣으면 물론 더 맛있어지긴 하겠지. 그러나 '좀 더 맛있게' 먹으려는 그 노력이 도를 지나치면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연교네 가족들처럼 짜장라면에 채끝살을 얹어서 먹는 뻘짓을 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 어떤 노력도 부재료도 필요 없이, 그 라면 하나만 플레인하게 끓여도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안 매운 라면이 나는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운 거 좋아하고 잘 먹는다는 건 이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라고 다 매운 것을 잘 먹느냐 하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나 같은 '맵찔이'들은 수시로 '취향 존중'을 받지 못한다. 내가 유독 좋아하는 한 안 매운 라면은 인터넷에서 '괴식'의 아이콘 비슷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라 도대체 그걸 왜 돈 주고 사서 먹는지 모르겠다는 글들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눈에 띈다.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새삼 내 입맛이 이렇게나 어른스럽지 못하고 유별나구나 하고 서글퍼졌다가 아니 그까짓 매운 라면 좀 못 먹는 게 대놓고 이런 소리까지 들을 일인가 싶어 울컥 빈정이 상하기를 반복하곤 한다.


두 달 가까이 그 라면을 사다 먹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이리 저리 순서가 밀렸다. 마트에 가서 한 바퀴를 돌다가, 많이는 아니고 한 몇 백 원 정도 싸게 팔고 있는 것을 보고 어째 먹은 지가 좀 된 것 같은 기분이라 한 팩 사 왔다. 그리고 어제 점심에는 남은 찬밥을 먹어치울 겸, 오랜만에 그 라면을 끓여서 먹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였는데도 내 입에는 딱 맞아서 연신 이거지, 이 맛이지 하고 중얼거리며 맛있게 한 그릇을 잘 먹었다. 왜 돈 주고 사서 먹는지 모르겠다니, 이런 맛이니까 돈 주고 사서 먹는다는 말도 함께.


맵부심 있는 분들이 보기에 소위 맵찔이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까는 대충 짐작이 가는 바가 있지만, 너무 그렇게 구박하지는 마셨으면 좋겠다. 세상에 매운 라면은 수도 없이 많지만 안 매운 라면은 겨우 서너 종류뿐이기 때문에. 그거 아니면 라면 한 그릇 먹는 게 고통인 사람도, 그런 분들은 못 믿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도 그랬고 나도 그렇듯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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