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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28. 2024

구관이 명관이다

-183

몇 년 전의 일이다. 카드 때문에 아주 크게 고생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신용카드라는 물건에 대해 있는 정 없는 정이 다 떨어지고 말아서, 그 이후로는 '후불결제' 비슷한 것은 쳐다보지도 않고 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도, 큰 사치만 하지 않으면 의외로 살만하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다.


다만 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단 한 가지 불편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교통카드 문제다. 버스카드 충전은 체크카드로 할 수 없고 오로지 현금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버스 카드 충전을 좀 하려다가 나는 요즘 현찰 쓰는 곳이 현격하게 줄었고 그 덕분에 ATM에서 현찰 만 원 찾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었다. 가끔은 인근의 ATM기들이 죄다 현금부족이거나 고장 상태여서 버스로 한 정거장 이상의 거리를 걸어간 적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게 사용 중인 버스 카드가, 얼마 전부터는 모서리 쪽의 플라스틱 코팅이 들고일어나기 시작해 영 너덜너덜해졌다. 지갑에 넣은 채로 태그를 하면 자꾸만 카드를 한 장만 대 달라는 메시지가 떠서 교통 카드만 반 장쯤 끄집어낸 후 태그를 하고 있는데 그때 필요 이상 지갑 속을 들락날락하게 돼서 그런 게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이걸 버리고 하나 새로 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요즘은 모바일 교통카드라는 것도 있다던데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이것저것 검색해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편리해 보였다. 간편 결제를 연결해 두면 굳이 현금을 찾아서 따로 충전할 필요가 없고, 버스 한 번 탈 때마다 버스카드를 지갑에서 반 장쯤 끄집어내는 '모양 빠지는' 직을 하지 않아도 도고, 아니 그 이전에 지갑 자체를 꺼낼 필요가 없을 테니까. 만 40세 이상이면 교통비 환급도 얼마쯤 해준다는 모양이니 이런 좋은 걸 두고 굳이 이 구식 버스카드를 계속 써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내내 하고 있었다.


어제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 가면서, 드디어 그 모바일 교통카드라는 걸 써볼 기회가 생겼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마지막으로 결제도 연결하고, NFC 태그도 켜 두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제 버스에 올라 태그한 핸드폰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케이스도 벗겨보고, NFC 옵션을 껐다가 켜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도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짜증나고 분한 마음에 발을 쾅쾅 구르듯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지갑 속에 곱게 넣어뒀던 버스 카드에 만 원을 충전해서 그걸로 버스를 탔다.


뭘 잘못해서 그렇게 됐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당분간은 그 편리한 모바일 교통카드를 써볼 엄두는 별로 안 날 것 같다는 사실이다. 불편해도, 다소 모양이 빠져도, 그저 늘 쓰던 물건이 제일이다. 나도 이런 식으로 나이를 먹고, 꼰대가 되어가나 보다. 어제 봉안당 가서도 푸념 비슷하게 한 말이지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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