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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y 31. 2024

시절인연

-186

잔뜩 기대를 하고 샀던 작약이 꽃을 잘 피우지 못해서 판매자님에게 문의 글을 올렸더니 고맙게도 재배송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이야기까지를 얼마 전 브런치에 쓴 바가 있다. 나는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은 사용하기 함들 정도이거나 누가 봐도 사용감이 뚜렷한 등의 그야말로 중대한 하자가 있지 않은 이상은 어지간해서는 반품이나 교환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이런 일은 거의 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재배송에 들어간다는 알림이 월요일쯤에 왔다. 배송에는 넉넉잡아 영업일 기준 3일 정도가 걸릴 거라고 해서 수요일이나 목요일쯤에는 새 작약을 받겠거니 생각했다. 일전에 사 온 우선국이 역시나 국화답게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어서 그때까지 꽃 문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그러던 사이에 원래 있던 작약들은 아닌 게 아니라 수관이 막히기라도 한 건지 꽃잎 한 장 펼쳐보지 못한 채로 차근차근 말라갔다. 결국 어제 아침에는 마음이 아픈 것을 무릅쓰고 전부 잘라서 버렸다. 새 작약이 올 테니까.


점심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가, 나는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배송 건으로 연락드렸으니 꼭 전화 좀 주시라는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여기서 좀 뒤통수가 쎄했다. 꾹 참고 전화를 해 봤더니 재배송 나갔던 꽃이 파손되었고, 그래서 그냥 환불 처리를 해 드리면 안 되겠느냐고 한다. 맥이 탁 풀리는 것 반, 조금 짜증이 나는 것 반, 이렇게 억지로 받는 작약이 딱히 반가울 것 같지 않은 맘 반 해서 그냥 알겠다고 대답하고 대충 전화를 끊었다.


간만에 좀 큰맘 먹고,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화사하고 풍성한 꽃을 보고 싶었던지라 이번 작약은 영 실망만을 안겨주고 내 곁을 떠나가 버렸다. 이렇게 생긴 마음의 상처는 제법 오래간다. 나는 한 번인지 두 번인지 큰맘 먹고 수국을 사 왔다가 사흘도 못 넘기고 시드는 걸 보고는 2년이 가깝도록 다시는 수국을 사지 않고 있다. 작약도 결국 그 전철을 밟으려나. 시절인연이라고, 인연에도 다 때가 있다고 한다. 시기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뭐 그런 뜻이다. 5월의 작약은 아무래도 나와는 인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 이래서 결국 우선국이 지기 전에 또 다른 꽃을 사다가 꽂아놓아야 하게 생겼다. 이번엔 무슨 꽃을 살까. 얼마 전에 흰 백합 주문이 다시 열렸던데 그거나 살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작약의 활짝 핀 자태가 눈앞에 아른거려 영 빈정이 상한다. 꽃병에 꽃 한 가지 사서 꽂아놓는 것도 쉽지 않으니, 산다는 게 어떻게 쉬울 수가 있겠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한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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