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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5. 2024

다 이유가 있다

-201

생각보다 의외로 빨리 떨어지는 것 중에 식용유가 있다. 1리터 남짓 정도 하는 중간 정도 병을 사다 놓으면 내 기분 같아서는 한 1년쯤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는다. 그나마 파스타나 리조또 같은 걸 해 먹을 때 쓰는 올리브유는 아예 따로 있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식용유가 까딱까딱 떨어져 갈 무렵이면 기름만 퍼먹고 사나 하는 눈먼 구박을 가끔 스스로에게 하기도 한다.


지금 쓰고 있는 식용유는 한 마트의 PB 상품이다. 가격은 싼데 양은 많고, 무엇보다도 병이 예뻤다. 보통 식용유 하면 떠오르는 손잡이 일체형의 멋대가리 없는 몸체에다가 두껍고 투박한 뚜껑이 붙은 그런 용기가 아니라, 적당히 통통하면서도  목부터가 늘씬하게 빠진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다가 얇고 깔끔한 마개가 붙어 있다. 실은 만족도가 꽤 높은 편이어서 다음에도 어지간하면 같은 식용유를 사야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기 좋은 떡이 꼭 먹기도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 식용유는 대번 처음 쓸 때부터 기름을 따라내고 나면 흘러나오던 기름들이 알아서 쏙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 옆을 타고 끈적끈적 흘러내리는 바람에 물티슈로 두 번 세 번 닦는 마무리를 시키는 좀 고약한 버릇이 있었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고 요령껏 잘 따르면 그러지 않는 날도 대여섯 번에 한 번 정도는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식용유 따르는 각도와 흘러나오는 속도 같은 거나 일일이 생각하고 있기에는 내 삶도 다소 정신이 없기에, 나는 대개 이런 식으로 병 밖으로 흘러내리는 기름을 닦아내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곤 한다.


그리고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이 식용유는 높이에 비해 넓이가 넓은 '똥똥한' 모양을 하고 있고, 그래서 보통 사람보다 손이 다소 작은 나로서는 기껏 손잡이로 쓰라고 몸체를 움푹하게 집어넣어 놓은 그 부분에 손을 집어넣어 병을 쉽게 들기가 어려워서 상대적으로 가느다란 병의 주둥이를 잡고 들어 올리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별다른 의심 없이 식용유랄 꺼내려고 주둥이를 잡고 번쩍 드는 순간 뚜껑이 똑바로 닫히지 않았던지 들어 올려졌던 식용유병이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져 기름이 튀어나와 사방에 묻는 대형 참사가 한 번 났었다. 그리고 그날 결심했다. 지금까지 즐거웠고 앞으로 다시는 보지 말자고.


기름 자체의 문제도 아닌 기름 담는 용기의 문제로 이렇게 몇 번이나 빈정을 상하고 나니 식용유 만드는 회사에서 나오는 제품들 특유의 그 투박하지만 튼튼한 병과 잡기 쉬운 손잡이와 어지간해서는 기름이 바깥으로 흘러내리지 않는 두꺼운 뚜껑이 그리워진다. 그 제품들이 마트 PB 상품에 비해 비싼 것은 그런 노하우 또한 제품의 가격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식용유를 살 때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늘 눈에 익은 그 옹기에 단 '그냥' 식용유를 주문할 참이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병 하나 예쁘게 못 만드나 어쩌고 해도, 오래되어 세월을 묵은 것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사람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를 잘 모르게 마련이라는 것까지도.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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