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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7. 2024

물티슈 두 장만큼의 행복

-203

그는 땀이 많았다. 땀이 많았다기보다는 몸에 열이 많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은데 싶은 날씨부터도 그는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한여름쯤이 되면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질 정도로 그야말로 '비 오듯이' 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런 것 치고, 뭐 평생 내내 이러고 살아왔기 때문에 딱히 불편한 줄도 짜증 나는 줄도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좀 민망하다는 점만을 뺀다면.


이런 그였던지라 더운 여름이 되면 밥 좀 하겠다고 가스레인지 앞에 붙어 서서 뭔가를 볶거나 굽거나 끓이느라 반쯤은 땀으로 샤워를 하고서야 식탁 앞에 앉을 수가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봤자 주방까지는 찬바람이 만족할 만큼 잘 오지 않고, 온다 하더라도 불 앞에 붙어 서 있으니 별반 소용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여름은 더워서 여름이고 더우니 땀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평생 이러고 살아왔기 때문에 딱히 불편하거나 짜증 나거나 하진 않는다고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옆에서 그렇게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만든 밥을 염치없이 냉큼 집어먹기만 하는 내게는 늘 쳐다보는 게 고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끔 고기를 먹으러 가면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물수건을 주는 집이 간혹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 물수건으로 손을 닦을 때, 더해서 매장 안의 시원한 바람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더위가 한순간이 사그라드는 기분이 들던 것도. 그런 걸 어떻게 집에서도 좀 해볼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떠오른 것이 물티슈였다. 시험 삼아 물티슈 네 장을 뽑아 냉동실에 이리저리 걸쳐서 넣어두었다. 그리고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를 듣고 그 물티슈를 꺼내 두 장을 그에게 건넸다. 물티슈는 워낙 얇아서 별로 오래 넣어두지도 않았는데도 넣어둔 모양 그대로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그를 20년 넘게 알고 지내왔지만 그 얼린 물티슈로 땀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그가 짓던 행복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야, 이거 진짜 좋은 생각이라고. 이런 기특한 생각을 어떻게 다 했느냐는 칭찬에 받아쓰기 100점을 받은 유치원생처럼 으쓱해졌던 기억도 있다.


작년과 재작년 동안 그 얼린 물티슈는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췄다. 얼린 물티슈씩이나 필요할 만큼 불 앞에 붙어 서서 거창한 음식을 만들지 않기도 했거니와 그가 떠나면서 그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일시적으로 기억에서 해제돼 버린 탓이 컸다. 그리고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방청소를 하고 청소기를 밀면서 콧잔등으로 연신 배어오르는 땀을 닦다가 정말 누가 옆에서 그거 있잖아, 하고 가르쳐주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 얼린 물티슈 생각이 났다. 나는 물티슈 두 장을 냉동실에 펴서 넣어놓았고, 청소에 홈트까지를 다 마치고 난 후 그 차디찬 물티슈로 얼굴과 손을 닦으며 잠시 행복해졌다. 그때처럼.


그는 떠났고 그와 엮여 있던 내 삶의 즐거움들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나는 이제 주말 새벽에 영화를 보느라 밤을 새우지 않고 매주 새로운 빵을 사러 갈 기대에 부풀지도 않는다. 적당한 거리에 크고 유명한 쇼핑몰이 들어섰다고 해도 일부러 시간을 내 구경하러 가지 않고 가끔 서울에서 미팅을 할 일이 생기면 그걸 핑계 삼아 홍대며 강남역 근처를 구경하러 다니지도 않는다. 내 인생의 많은 즐거움은 그와 함께 떠나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겠지. 그건 아마 그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올여름에는 일단 얼린 물티슈 두 장부터 시작해 보기로 한다. 당신이 있던 그때처럼.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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