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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19. 2024

얼음 좀 나눠먹읍시다

-205

그가 떠나고 화분을 키우고 매주 꽃병에 꽂을 꽂아두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소위 '식물 저승사자'의 부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무려 제주도에서 사가지고 온 풍란이 한 번, 선물로 받은 레몬 밤 화분이 또 한 번 해서 두 번을 죽이고 나니 덜컥 나 같은 인간의 손에 뭔가의 생명을 맡기는 것이 두려워졌다.


반면에 어머니는 화분을 참 잘 키우시는 편이셨다. 딱히 영양제를 준다든가 분갈이를 자주 한다든가 화분 잘 키우는 사람의 클리셰인 물수건을 들고 앉아 일일이 이파리를 닦아주는 등의 손품을 팔지 않으셔도 어머니의 손에 들어간 화분은 잠 다들 잘 컸다. 특히나 어머니는 꽃 안 피는 화분에서 꽃을 잘 피우셨다. 도대체가 5년이 넘도록 키워도 꽃 한 번 피지 않아서 버려야겠다는 주변 분의 말씀을 듣고 집으로 가져오셨는데, 어머니의 손에 들어온 그 해에 그 군자란은 바로 꽃을 피웠다. 하도 신기해서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말씀은 그랬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똑같다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꽃봉오리 비슷한 게 맺히면 이건 사람으로 치면 임신을 한 것이니 더 먹고 싶은 게 많을 테니 평소보다 물을 조금 더 자주, 많이 준다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비결은 그게 다였다.


이미 몇 번 그런 글을 쓴 것 같지만 꽃병에 꽂아놓는 꽃들도 여름을 탄다. 더운 여름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가 걱정돼 창문을 닫아 놓고 한나절 남짓 외출했다 돌아와 보면 꽃들이 그새 생기를 다 잃고 축 쳐져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여름은 이젠 웬만한 정도의 인내심으로는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만큼 더워졌고, 그건 사람뿐만 아니라 꽃에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침마다 꽃병에 물을 갈면서 얼음을 한 주먹씩 넣어주고 있다. 여름철에는 꽃병에 얼음을 넣어주면 좋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한 조각 정도 넣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그냥, 아낌없이 한 주먹씩 넣어주고 있다. 사람도 이렇게 더운데 너희들이라고 안 덥겠냐. 뭐 그런 생각에서다. 나는 더우면 선풍기를 켤 수도 있고 여차하면 두 눈 딱 감고 에어컨을 켤 수도 있고 찬 물도 마실 수 있지만 유리병 안에 꽂힌 채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이 더운 여름을 지나가야 하는 꽃들에게 그까짓 얼음 한 주먹쯤 준다고 해서 크게 탈이 날 것 같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은, 식물이나 사람이나 똑같다던 어머니 말씀이 불쑥 생각난 탓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게 아침에 얼음을 한 주먹 넣어줘 봐야 10분쯤 지나면 이미 얼음은 흔적도 없이 녹아 있고, 일과를 마칠 시간쯤이 되면 꽃병 속의 물은 얼음 따위 넣으나 안 넣으나 한 수준으로 미지근해져 있다. 그래도 안 넣는 것보다야 조금은 낫지 않겠냐고, 어차피 7월이 되고 8월이 되어 여기서 더 더워지면 그때는 에어컨을 켤 테니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보자고 그렇게 생각한다. 내 옆에 뭔가를 둔다는 것은 그 무언가를 책임지고 간수하기 위해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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