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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2. 2024

사람이 꽃에게

-208

여름은 사람에게나 꽃에게나 힘든 계절이다. 아무리 날마다 아침에 물을 갈고 줄기를 잘라주고 얼음까지 넣어줘도 그걸로 나기에는 한국의 여름은 너무 덥다. 뿌리라도 흙에 박혀 있어서 그걸로 제게 필요한 양분을 필요한 만큼 수시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꽃병에 꽂힌 꽃들에게 여름은 참 잔인한 계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번 꽃은 뭘 사다 놓을까를 두고 꽤 오래 고민했다. 그놈의 수국이 자꾸 아름아름 눈에 밟혀서였다. 그라면 아마 수국을 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나는 이런 순간에 의외로 냉정한 데가 있어서, 결국 사 와서 사흘도 못 갈지도 모르는 수국은 한 번만 더 참고 다음에 사기로 눈 질끈 감고 미루고 리시안셔스와 '여름꽃' 몇 대를 랜덤으로 보내준다는 상품 하나를 골라서 결제했다, 리시안셔스도 사다 놓은 지가 제법 지난 느낌이고 또한 이맘때 꽂아놓기로는 나름 제격이니까.


택배는 하루 중에서도 제일 더운 오후 세 시쯤에 왔다. 배송 완료 메시지가 뜨자마자 허둥지둥 택배 박스를 가지고 들어와 열었다. 박스 제일 아래 깔려있는 보냉팩은 이미 녹아서 물주머니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꽃들의 줄기 절단면이 꽂혀 있는 오아시스 폼은 뜨끈뜨근해서 이러다 꽃들 다 익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겁을 했다. 이 더운 날에 먼 길을 박스 안에 갇혀서 온 탓인지 꽃들도 영 상태가 시들시들해서 내가 다 마음이 급해졌다. 온 꽃들은 워낙 양이 많아서 오늘도 꽃병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고, 두 개를 가져다가 찬 물에 얼음까지 듬뿍 타서 부랴부랴 멀리서부터 고생하며 온 꽃들에게 대접했다.


사실 이번에 산 꽃은 리시안셔스보다는 랜덤으로 보내준다는 '여름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가 내심 궁금했다. 그리고 오늘 꽃을 받아본 바, 나는 아직도 꽃 공부를 한참이나 더 해야 되겠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랜덤으로 온 꽃들 중에 내가 이름을 아는 것이라고는 거베라와 옥시페탈룸 뿐이었다. 저번에 사봤던 우선국 비슷한 보랏빛 나는 국화처럼 생긴 꽃도 있었지만 우선국은 아닌 것 같았고 마트리카리야 비슷한 꽃도 몇 대 있었는데 이 녀석도 워낙 비슷하게 생긴 꽃들이 많아 긴지 아닌지가 확실하지 않다. 그 외에 빨간 열매가 조랑조랑 열린 생전 처음 보는 소재도 몇 대나 있었고 은색이 나는 둥글넓적한 이파리가 달린 식물도 몇 대나 왔는데 이 녀석들은 하나같이 이름을 모른다. 아무려나, 다급하게 아랫부분 이파리들을 떼고 줄기를 다듬어 꽂아두니 푸릇푸릇한 기운이 사방에 넘쳐나는 것이 아 여름이구나 하는 실감이 나서 그것 하나만은 좋긴 하다.


저녁이 되어 꽃병을 들여다보니 담아 두었던 물이 훅 줄어있어서 조금 안심했다. 시들시들하던 꽃들도 한결 생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고개를 체 못 들고 있는 몇몇 녀석이 걱정이긴 하지만 이젠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꽃병에 꽂힌 꽃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을 갈아주고 줄기를 잘라주고 겉잎을 떼어주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쉽지 않은 계절이지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부디 조금이라도 오래, 피고 싶은 만큼 다 피고 졌으면 좋겠다. 결국 사람이 꽃에게 부탁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인 것 같다. 어쩌면 꽃이 아닌, 사람끼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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