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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n 25. 2024

내내 이러면 참 좋을 텐데

-211

어제도 분명히 아침에 일어나 꽃병에 물을 갈고 청소기를 밀고 홈트를 할 때까지는 더웠다. 냉동실의 얼린 물티슈로 땀이 난 얼굴을 닦는 기분이 그지없이 좋았던 기억이 나니까 말이다. 오랜만에 또 계란말이 김밥이나 한 줄 사다 먹자고 집을 나서서 걸어가면서 어라 오늘은 생각보다 견딜 만 한데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난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정오도 되기 전이었으니 날씨가 본격적으로 불타오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했다.


점심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는 잠깐 선풍기 바람을 쏘였다. 그러나 땀이 생각보다 빨리 식어서 금세 껐다. 그리고 오후 늦은 시간이 될 때까지 별로 더운 줄 모르고 창문만 열어놓은 채 하던 일들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해가 질 무렵 깨달았다. 아니 오늘 날씨 왜 이렇게 선선하지. 며칠 전 어쩔 수 없이 에어컨을 개시하게 만들었던 그 35도까지 기온이 치솟았던 그날은 일몰 후 기온이 31도나 됐었는데. 어제 날씨는 거짓말 좀 보태서 한여름이 지나가고 막 찬바람이 나기 시작하는 그 무렵의 가을 날씨 비슷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제 비가 좀 왔고, 그 서슬에 눅눅하던 습기가 싹 씻겨 내려가면서 덩달아 기온도 좀 식어서 그랬는지. 덕분에 어제는 오후 내내 선품기고 에어컨이고 전부 개점휴업 상태로 무사히 하루를 보냈다.


가끔 이런 식으로, 비 온 다음날 하루 그다지 덥지 않은 여름날은 그야말로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을 가다가 5만 원짜리까지는 아니더라도 5천 원짜리 한 장 정도는 주운 기분이랄까. 조금만 움직여도 땀과 짜증이 치솟고,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선풍기든 에어컨이든 돌려야 하고, 그러고 있자면 머리도 아프고 어딘가 코도 좀 맹맹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잠시 끄고, 그러나 끄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더위와 불쾌감을 이기지 못해 다시 켜는 짓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는 어제 같은 '거저먹는' 하루는 참 반갑고 고맙다. 핸드폰 어플에 의하면 어제의 최고 기온은 26도였다고 하고 오늘도 27도 정도라는 모양이니 오늘 정도까지는 본격적으로 사람을 볶아대기 전에 약간 봐주는 기간이려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뭐, 길게 가지는 않을 것이다. 대번 이번주 온도는 내내 29도에서 3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가 예보되어 있다. 그리고 핸드폰 어플까지 가지 않아도 이제 6월 말이고 다음 주면 이젠 입에 발린 말로라도 여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7월이니 이제부터 꼬박 두 달간은 그야말로 더워서 죽어나갈 일만 남은 참이다. 내내 이런 날씨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런 나부터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이미 안다. 요즘 5천 원으로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게 고작일 뿐이지만, 그 5천 원을 길 가다 줍는 일이 뭐 얼마나 자주 있던가. 그러니까 그만큼의 횡재였다는 말이겠다. 어제 같은 선선한 여름 날씨는. 아, 어제 같은 날 어디 좀 놀러 나갔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것도 혼자 참 청승맞았겠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히 입을 다문다. 어제 같은 날씨가 5만 원짜리가 아닌 5천 원짜리 정도로밖에 여겨지는 건 내가 혼자 남은 탓이기도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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