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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20. 2024

상처 난 마음에는 장미를

-236

세상엔 가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결국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고 마는 그런 관계라는 것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마 나와 수국의 관계가 좀 그렇지 않은가 싶다. 이번 수국 또한 결과적으로 사흘인지 나흘인지를 넘기지 못하고 세 송이가 전부 시들어 버렸고 나는 이 까다로운 꽃에 앞발뒷발 다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속이 상한 것도 속이 상하는 거지만 그의 책상 근처를 지나다닐 때마다 무슨 결벽증이라도 걸린 사람 마냥 지키고 서서 꽃이 얼마나 시들었는지를 살펴보고, 조금만 시들시들하다 싶으면 욕조에 물을 받아 꽃을 담가놓고, 괜히 애가 타서 오며 가며 꽃을 들었다 놨다 해보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꽃이 아니라 상전을 하나 모셔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이런 기분으로는 꽃을 봐도 별로 행복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김광석의 노래 중에도 있지 않던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렇게 수국에 3연패를 당하고 풀 죽어 있는 나에게, 이어서 주문한 장미 한 단이 배송돼 왔다.


몇 번인가 쓴 말 같지만 장미는 그 미모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흔한' 꽃이어서 꽃을 살 때 오히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이야기가 달라서, 무조건 장미를 사야겠다고 별렀다. 그리고 때마침 오픈된 미니장미 상품이 있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 단을 주문하고, 이런저런 일로 신세를 진 지인 분의 주소로도 한 단을 주문했다. 원래 꽃이란 내 돈 주고 사기에는 다소 돈이 아까워도 남이 사주는 걸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선물이니까.


하필이면 며칠 전부터 억수같이 비가 내려서 이 비에 택배가 무사히 올까 하는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장미는 잠깐 비가 소강상태를 맞은 어제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집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한 꽃병에 얼음물을 받아서, 이파리를 따고 줄기를 정리한 장미를 한 단 가득 꽂아서 책상에 갖다 두니 그 모양을 쳐다만 보는 걸로도 지난 며칠간 수국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가 싹 날아가는 느낌이다. 저녁쯤에는 퇴근해 집에 온 지인분이 '옷도 안 갈아입고 손도 안 씻고' 부랴부랴 꽂으셨다는 장미 사진을 보내주셨다. 컬러를 랜덤으로 보낸다는 말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 온 장미는 연노란색 나는 녀석이 많고 지인의 댁으로 간 장미는 아주 연한 핑크색 장미가 많았다. 좋은 선물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에 덩달아 흐뭇해지기도 했다.


마음에 상처가 많으신 날은 집 근처 꽃집에 들러서, 푸짐하게 한 다발 까진 아니라도 적당히 만 원어치 정도의 장미를 한 번 사다가 집안에 장식해 보시기를 권한다. 그냥 아주 뻔하고 식상한 꽃으로만 알고 있던 장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생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고, 그냥 바라만 봐도 좋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도 다시금 깨닫게 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앞으로 다시는 수국 같은 건 사지 않겠다고 이를 갈던 마음이 장미를 보고 조금 누그러져서 내가 또 뭘 잘못했겠거니 하고 생각하게끔까지 되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예쁜 건 죄가 없다. 장미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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