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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Jul 22. 2024

아직까지는

-238

금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하루 종일 비가 오지 않기에, 좀 안심하고 에어컨을 켜지 않은 대신 창문을 있는 대로 다 열고 선풍기를 틀어놓고 있었다. 전날 한바탕 내린 비 탓인지 그 정도로도 견딜 만 하기에 오늘 하루도 이렇게 잘 보내보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녁 7시 쯤, 갑자기 미친 듯이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열려있던 창문을 닫았지만 그 사이 들이친 비로 집안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좀 투덜거리며 비 들이친 바닥을 적당히 닦고 에어컨을 켜는 선에서 그 소동은 일단락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어제 아침, 아침 정리를 마치고 그의 책상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켜다가 나는 모니터의 오른쪽 하단 모서리 부분에 유리패널 뒤로 습기가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문을 닫는다고 닫았지만 비가 쏟아지는 속도가 내 반응 속도보다 훨씬 빨랐고, 그래서 모니터가 창문으로 들이친 비를 좀 맞아버린 모양이었다. 당장 그 모니터로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진 않긴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어서 인터넷으로 '습기 찬 모니터' '비 맞은 모니터' 따위를 열심히 검색해 보았다. AS 센터에 가져가는 것 외에 가장 빠른 방법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모니터를 뜯어서 패널을 닦아내는 것이라고 한다. 헤어드라이어 같은 것을 켜서 습기 찬 부분을 말리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자칫하면 뜨거운 바람이 한 부분에만 오래 닿아 플라스틱 패널이 휜다든가 부속에 이상을 초래할 염려가 았으니 그냥 꾹 참고 습기가 알아서 마를 때까지 며칠 기다리라는 말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의 책상에 있는 데스크탑에는 세 개의 웹 페이지가 띄워져 있다. 하나는 맛있는 라면 끓이는 방법에 대한 어느 블로그의 포스팅, 하나는 두부 유부초밥 레시피, 하나는 그가 쓰던 포털 사이트의 캘린더 서비스 창이다. 이 창들은 모두 떠나기 전날 밤 그가 보고 있던 페이지들이다. 그날로부터 2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 사이 몇 번이나 컴퓨터를 재부팅하고 심지어는 몇 달간 입원으로 집을 비우기까지 했으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 그의 데스크탑에 저 페이지들을 띄워놓고 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지금 그의 컴퓨터에 띄워진 페이지들은 그가 띄워놓은 그 상태 그대로는 아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라면 그가 아직 내 곁에 있던 그 시절의 뭔가를 어떻게든 내 곁에 붙들어두고 싶을 뿐이다.


그가 떠나간 그 해 10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데스크탑 모니터가 갑자기 말썽을 부려 고장 난 일이 있었다. 갑자기 모니터 값으로 수십만 원을 지출하는 것도 부담스러워 그냥 그의 모니터를 가져다 쓸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위에도 적었듯,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그가 내 곁에 있던 시절의 뭔가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모니터에 찬 습기가 더 신경이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 모니터를 언제까지 저 자리에 둘 수 있을까. 저 모니터가 제 수명을 유지할 때까지가 아닐까. 물론 내 기분 같아서는 저 모니터가 고장 나면 다른 모니터를 사서라도 계속 그가 나를 위해 읽고 있던 레시피를 띄워놓고 싶다. 그러나 그가 그런 '뻘짓'까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서, 살짝 고민이 되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그냥 지금의 모니터가 내 부주의로 먹은 습기를 빨리 털어내고 쾌차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지 않겠나 싶다.


아직까지는 그래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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