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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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연식이 약간 있어서 그런지, 우리 집은 돌아가면서 한 군데씩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그런 것들을 체크해 놓았다가 하나씩 고치거나 개선하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일들 중의 하나였다. 당장만 해도 바닥의 마감재가 몇 군데 들고일어난 곳이 있고 오래 썼다 싶은 욕실의 샤워기 수전도 좀 바꿨으면 했었고 손바닥만 한 베란다에 깔아놓은 러그도 좀 바꾸는 게 어떤지 하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주방 싱크대 옆의 수납장을 하나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수납장은 이 집으로 이사를 올 때 급하게 대충 샀던지라 썩 마음에 들지도, 튼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뭐든 다 그렇지만 한 번 집에 들어와 자리를 잡아버린 물건을 바꾸는 것에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그와 나는 그냥 모른 체하고 그 수납장을 10년 넘게 썼다.


그는 몇 번씩 줄자를 들고나가 수납장의 길이와 너비, 높이를 쟀고 어떤 디자인으로 생긴 것을 놓으면 지금의 동선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지금의 수납장 안에 욱여넣어놓은 컵들과 그릇들, 밥솥 등등을 다 집어넣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러던 끝에 이런 것을 사면 되겠다고 골라놓은 물건 하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까지 했으니 그걸 주문해서 물건을 채워 넣고 낡은 수납장을 버리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는 전에 없이 미적거렸다. 지금 생각하니 수납장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다 꺼내고, 낡은 것을 들어내고, 그 아래 쌓인 먼지들을 다 닦아내고, 새 수납장을 들여놓고, 다시 그 안에 들어갈 물건들을 정리하는 그 모든 일들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그만큼 그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테다. 물론 난 그런 것을 꿈에도 몰랐지만.


그렇게 미적대는 사이 그는 떠났고, 나는 며칠 전 불쑥 밀린 숙제라도 생각난 듯 이번에야말로 주방 수납장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골라놓은 수납장은 지금의 것과 사이즈가 정확히 같았고 그가 꼼꼼하게 고른 물건답게 예뻤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금의 수납장 속에 들어가 있는 컵들을 도저히 다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갖은 곳을 뒤져가며 다시 수납장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숙고한 끝에 나는 수납장 하나를 최종 낙점했다. 그러나 그래 놓고도 나는 며칠 동안 주문을 하지 못했다. DIY 제품이라는데 이걸 가져오면 나 혼자 조립할 수 있을 것인지, 이걸 가져다가 지금 수납장의 자리에 놓으면 예상보다 많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건 아닌지, 그런 것들을 확신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 나는 용기를 내서 수납장을 주문했고, 어제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을 뚫고 택배가 도착했다.


원목 상판 세 개와 철제 프레임이 들어있는 그 박스는 나 혼자 힘으로는 집안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만도 힘들 만큼 크고 무거웠다. 무슨 사교댄스라도 추듯 내 키만 한 박스를 붙들고 모서리를 빙빙 돌러 바닥을 찧으면서 일단 나는 박스를 집 안까지 옮기는 데 성공했다. 박스의 겉에는 이 제품은 DIY이기 때문에 조립을 해버리면 반품이 되지 않고 박스를 분실할 시 절대로 반품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경고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반쯤은 겁을 먹은 상태로 박스를 뜯고 일단 구성품이 다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 반품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설명서에 의하면 이 제품의 조립 난이도는 총 5단계 중 가장 쉬운 1단계로, 혼자서 조립하는데 10분에서 2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웬걸. 내가 그 수납장을 조립하는 데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철제 프레임을 조립하는 나사가 고정되지 않아 한 30분을 까먹어버린 게 제일 컸다. 어찌어찌 프레임을 조립해 놓고도 누구 하나 옆에서 붙잡아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상판을 대느라 나사 하나를 박기 위해 프레임을 바로 세웠다 옆으로 눕혔다 거꾸로 뒤집었다를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씨름한 끝에 나는 겨우 수납장을 조립하는 데 성공했다.


다 조립한 새 수납장을 방 안에 두고, 이제는 낡은 수납장을 들어내는 일을 해야 했다. 나는 그 속에 들어있던 온갖 컵들과 그릇들을 전부 꺼내고 수납장을 들어냈다. 그리고 나는 이 낡은 수납장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지대 네 개 중 하나는 이미 부러진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도 상태가 별로 좋지 못했다. 끄집어내느라 몇 번을 밀고 당겼더니 남은 지지대 중 하나가 마저 부러져 흔들거리며 내려앉는 걸 보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이 수납장의 수명은 이미 오래전에 다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딴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제 소임을 다하고 있었던 거였다. 이제는 정말 보내줘야 할 때였다. 나는 미리 사두었던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낡은 수납장을 바깥에 내놓았다.


몇 년간이나 들어내지 않은 수납장 아래에는 묵은 먼지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나는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수저받침 한 개와 텀블러 뚜껑 한 개를 찾았다. 그것들을 닦아내고 새 수납장을 자리에 갖다 놓고, 꾸역꾸역 들어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갖다 놓았다. 그러는 데 또 한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는 사이사이 바깥에서는 한 번씩 요란한 소나기가 내렸고, 그때마다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닫으러 집 안을 가로질러 뛰어가야 했다. 일곱 시쯤, 오늘의 펜글씨 쓰기를 마쳐놓고 시작한 주방 수납장 교체 프로젝트는 밤 10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끝났다.


새로 산 수납장은 어떤 부분에서는 기대했던 것보다 좋고, 어떤 부분에서는 기대에 좀 못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만하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앞으로 내 인생도 그럴 것이다. 어떤 부분은 예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고, 또 어떤 부분은 각오했던 것보다도 힘들겠지. 그러나 이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혼자서 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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