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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04. 2024

핸드폰 좀 보여주세요

-251

생전 처음 가보는 한 기관에 가서 서류를 발급받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담당자는 친절하게도 날도 더운데 이메일로 받으시는 방법도 있다는 안내를 해주셨지만 서류 원본을 우편으로 제출해야만 하는 일이어서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집에서 그 기관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중간에 한 번 내려서 갈아타면 20분쯤 빨리 도착할 수 있었고, 한 번에 가는 버스를 타면 다소 빙빙 돌아 한 시간쯤이 걸렸다. 요즘 같은 날씨에 중간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도 싶지도 않았고, 내려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내려서 갈아탄다고 해서 꼭 20분 먼저 도착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 20분을 아껴서 빨리 일을 보고 빨리 돌아와야 하는 급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빙빙 돌아 목적지에 도착은 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초행길이었고 목적지 근처가 다소 복잡해서, 스마트폰의 지도앱을 켜놓고 한참이나 주변에 있는 온갖 간판들과 지도앱을 비교해 가며 장님 문고리 더듬듯 목적지를 찾아가야만 했다. 다행히 큰 실수는 하지 않고 목적지를 찾았고, 하필 내가 볼 일이 있는 부서의 점심시간이 다소 일러서 전화를 주셨던 담당자분이 아닌 다른 분이 내가 필요한 서류를 갖다 주셨다.


거기서부터 다시, 이제는 근처에 있다는 우체국까지 가는 길을 지도앱을 봐 가며 더듬더듬 찾아갔다. 요즘 우체국은 점심시간에 업무를 보지 않는 곳도 있지만 다행히 이 우체국은 그렇지는 않아서, 빠른 등기로 서류를 보내고는 아 이제 오늘 할 공식적인 일은 다 끝났다 하고 한숨을 돌리고는 예의 그 빙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 점심이나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우체국까지 오느라 길이 내기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엉뚱해져 버려서, 이번에도 버스 정류장을 찾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의 지도앱에 의지해야 할 잠이었다. 그렇게 건널목 앞까지 와서,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길을 건너가는 게 맞는지를 보려고 한참이나 주변의 간판들과 지도앱에 표시된 내용을 비교해보고 있던 참이었다.


뒤에서 느닷없이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나보다는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분이었다. 처음엔 뭐 길이라도 물어보시려는 건가 생각했다. 그런데 별로 그런 용건은 아닌 것 같았다. 이분은 몹시 고압적인 태도로 '지금 뭘 찍고 있는 거냐'고 따지듯이 한 마디 하더니 '핸드폰 좀 보여달라'고 불심검문이라도 하는 경찰처럼 요구해 왔다.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시느냐고 몇 번을 물었지만 이 분은 뭐 신고하려는 거 아니냐고, 핸드폰 보여달라는 말만 거듭거듭 반복하셨다. 그제야 나는 건널목 주변에 불법 주차된 채들이 몇 대 있고, 내가 그중 한 대의 번호판 같은 거라도 찍어서 민원 앱 같은 걸로 신고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거라는 정황을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순간 잠시 잊었던 무더위와 함께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핸드폰 보여드리고 아무것도 안 찍혀 있으면 그땐 어떡하실 거냐는 말이 목구멍 앞까지 올라왔지만 이 더운 날 이런 사람과 두 번 세 번 실랑이를 하는 것도 할 짓이 아니어서 보고 있던 지도 앱 화면을 보여드리고는 근처가 초행길이라 길을 찾고 있을 뿐이라고 꾹꾹 누른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기서마저도 아 난 그런 말 못 믿겠고 갤러리 보여달라고 하면 정말 폭발했을 것 같은데, 거짓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던지 그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그쯤에서 종결되었다. 물론 사과 같은 건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집에 오고도 내내 나는 혼자 괜히 분해서 투덜거렸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불법 주차는 자기가 해놓고 왜 지나가는 사람 핸드폰을 보여달래. 자기가 무슨 경찰이야? 차 대면 안 되는 데 차 대는 건 신고당할 수도 있다는 거까지 다 각오하고 대는 거 아니야? 날 언제 봤다고 대뜸 핸드폰을 보여달래? 그런 말들이 하루종일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정작 면전에서는 괜히 말 늘리기 싫어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한 그런 말들이. 그리고 이런 일들을 브런치 지면밖에는 털어놓을 데가 없을 때, 이제 나는 정말로 혼자 남았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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