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Aug 06. 2024

28도로 에어컨 틀 거면

-253

그는 몸에 열이 많았고 그래서 더위를 몹시 많이 탔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여름에 에어컨을 트는 문제만큼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차라리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외출 횟수를 줄여 기름값을 줄이면 줄일까 에이컨 트는 데 드는 전기료는 못 아낀다고 그는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뭐, 덕분에 나는 이날 이때껏 여름을 덥게 나 본 적이 거의 없긴 하다.


에어컨을 틀게 되면 그는 일단 파워냉방으로 맞춰서 한참을 틀고, 그래서 집안이 전체적으로 시원해진 후에 적당히 온도를 높이는 식으로 썼다. 보통 맞췄던 온도는 23도, 가끔 많이 덥다 싶은 날은 21도까지 가기도 했다. 가끔은 좀 춥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사시사철 내내 저러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여름에 더위 타는 문제로 괜한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래봤자 여름 서너 달 정도 동안의 일이니까.


그가 떠나고 혼자 지내기 시작한 후로, 우리 집의 에어컨 트는 루틴은 많이 달라졌다. 일단 오전에는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덜 덥기도 하고, 점심 준비를 하느라 왔다 갔다 할 일도 많이 생기고 가스레인지도 써야 하기 때문에 냉방 효율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전에는 아무리 더워도 어지간하면 선풍기 정도로 버틴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치운 후에, 너무 더워 도저히 안 되겠거나 비가 와서 창문을 열어둘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쭉 에어컨을 튼다. 내가 세팅한 온도는 28도이고, 이걸로 조금 덥다 싶으면 선풍기를 조금 같이 틀어준다. 나는 그만큼 더위를 많이 타지는 않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해도 어지간히 버틸만하다. 사실 에어컨을 틀어놓기만 해도 실내의 습도가 낮아져 훨씬 시원한 상태가 되기도 하고.


이 방법은 그가 에어컨을 틀 때만큼 '시원한' 맛은 없다. 그러나 그 대신 전기료는 훨씬 적게 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혼자 사는 주제에 에어컨씩이나 틀고 산다는 때아닌 자책감도 아주 많이는 자극하지 않아서 그것이 또한 좋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날씨가 조금 더 더워진 듯한 느낌이고, 그래서 28도로는 좀 후덥지근한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고집스럽게 28도로 설정해 놓은 뒤 간간히 선풍기를 트는 정도로 지내고 있다. 그가 이 모양을 본다면 그냥 좀 낮은 온도로 틀어서 온도를 떨어뜨린 후에 다시 온도를 높이는 편이 훨씬 전기료가 적게 나온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내온도 28도라니, 그럴 거면 에어컨 뭐하러 트냐고. 그러나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나 혼자 쐬겠다고 그가 있을 때처럼 집안의 공기가 구석구석 서늘해질 만큼 에어컨을 트는 건, 난 웬만해서는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누가 눈치라도 주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 괜히.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나이에, 텔레비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