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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08. 2024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을 때

-255

장미의 연관 검색어는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장미의 아이덴티티는 그 아름다움과 향기에도 있지만 아름다운 모양과 사뭇 다르게 줄기에 뾰족한 가시를 두르고 있는, 요즘 말로 '갭 모에'에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장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아름답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인의 대명사 비슷하게 여기저기서 비유의 대상으로서 야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는 옛날 말이다. 요즘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미끈하게 뻗은 줄기에는 가시는커녕 솜털 비슷한 것도 없어서 가끔 장미가 이렇게 민숭민숭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아마도 부단한 노력 끝에 꽃의 모양은 그대로 두고 가시만 없애버리는 식으로 품종이 개량된 것엘 테다. 뭐 덕분에, 가뜩이나 아침에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한 와중에 꽃병에 물을 갈고 꽃줄기를 다듬으면서 가시에 손이 찔리는 일을 당하지 않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또 세상의 모든 장미가 그런 방향으로 진화해 가고 있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현재 그의 책상을 지키고 있는 스프레이 장미는 노란색과 연핑크색이 반반 정도 섞여 있는데, 그중 핑크색 장미에는 제법 촘촘한 가시가 나 있다. 장미의 가시라는 것도 몇 가지 타입이 있어서 크고 굵은 가시들이 몇 군데 듬성듬성 나 있는 종이 있는가 하면 잘고 얇은 가시들이 자잘하게 줄기 전체를 뒤덮고 있는 종도 있는데 이번 장미는 후자였다. 시인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려 파상풍에 걸려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뭐 그 정도로 크고 굵은 가시는 아닌데, 피부 표면을 따끔따끔하게 찌르는 자잘한 가시들이 가득 나 있어서 한 줄기 한 줄기를 집어 들고 잎을 떼고 끝을 다듬을 때마다 가시가 없는 노란 장미의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던 장미 가시의 기세가 좀 누그러졌다고 생각된 것이 어제 아침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잡아 줄기를 자르고 꽃병에 꽂을 때까지도 별다른 따끔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며칠 지났다고 이제 내 손이 가시에 적응을 했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후쯤 그의 책상 곁을 지나가다가 들여다본 장미들은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아침마다 얼음물을 주고 줄기도 열심히 다듬어 주고 오후엔 내내 에어컨이 돌아가는 시원한 방 안에 둔다지만 역시나 이 더운 여름은 꽃병에 꽂힌 꽃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뿐만 아니라 늘 그랬던 것 같다. 가시가 있는 장미의 가시가 더 이상 따끔하지 않다는 말은 장미가 시들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도 뿌리가 잘린 상태에서 최대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이 들어가는 에너지를 줄이는 과정에서 가시를 짱짱하게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내 멋대로의 추측을 해볼 뿐이다. 부모님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등짝 한 대 맞아보면 알 수 있다는 것과도 비슷하게.


문득 섭섭해진다. 그에게도 장미처럼 가시가 있었더라면 나는 그날 그 이별을 조금 미리 알 수 있었을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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