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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11. 2024

세월에 장사 없다

-258

생전 하지 않다가 그가 떠난 이후로 하게 된 일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엔 포털 사이트의 캘린더에 대강의 일정을 정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작업은 그가 입이 닳도록 좀 하라고 권했으나 내가 결국은 생까고 하지 않던 일이다. 지금도 사실 썩 좋아서 하고 있진 않다. 해보니 편리한 점이 있더라는 것과 그를 생각하는 겸 해서 꾸역꾸역 하고 있는 중이다.


해가 바뀌면 나는 월 단위로 달력을 넘기면서 몇 가지 중요한 일정을 미리 표시해 둔다. 원래라면 우리끼리 챙기던 기념일 몇 가지와 그의 생일, 내 생일 정도가 고작이었을 텐데 그가 떠난 이후로는 그의 기일과 백중 등을 추가로 더 챙기게 되었다.


그저께 저녁쯤이었다. 다음 주엔 무슨 일정이 있나, 하고 주간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오늘 봉안당에 가는 것으로 체크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잠깐 의아해졌다. 매달 가는 일정 치고는 날짜가 너무 늦었고 딱히 우리가 챙기던 기념일도 아니고 내가 알기로 백중은 이번주가 아니라 다음 주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백중에 체크하려던 걸 잘못해서 일주일 일찍 체크를 해놨나, 하고 고개를 들어 달력을 바라보다가 나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니까, 작년 갑작스러운 일로 입원하게 된 그날이 8월 11일이었다. 나름 그것 또한 하나의 이벤트라고, 그에게 가서 작년 오늘 이만저만한 일이 있었노라고 보고하는 날로 그렇게 체크를 해 두었던 모양이다.


그게 벌써 1년 전이었다니. 잠깐 어안이 벙벙해진 기분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입원하게 되어 석 달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투병 아닌 투병을 했고,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와 보니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일상이 통째로 뒤엎어져 난장판이 되어 있던 것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땐 정말 그가 떠난 후 가까스로 1년 넘게 다잡아온 내가 다시 통째로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그 까마득한 일이 일어난 게 벌써 1년 전이라니.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충격적인 것은 오늘이 그날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떠나가버린 그날에야 감히 비길 수 없겠지만 그리 짧지만은 않은 내 인생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일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 안쯤에 들어갈 일이었는데도.


시간에, 세월에 장사가 없고 모든 일은 그렇게 퇴색되고 흐려진다. 나는 아직도 어느 수능 시험날 새벽 심야방송에서 고故 신해철 님이 한 말을 기억한다. 오늘 수능 시험을 본 분들, 특히나 시험을 좀 못 본 분들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만 제가 장담하건대 그거 몇 년 안에 여러분의 인생 10대 뉴스 턱걸이 등수에도 오르지 못하게 될 거라고.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했었다. 내가 본 수능도 꽤 역대급 불수능이었고 그래서 모의고사에서 늘 받던 점수보다 20점 가까이가 낮게 나와 의기소침했던 기억이 있지만 그 방송을 듣던 그 무렵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기억에서 밀려나버린 후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시간들도 그렇게, 조금만 기다리면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끄덕끄덕하고 넘어갈 만한 일들로 퇴색될까. 오늘은 가서 그런 걸 좀 물어봐야겠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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