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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13. 2024

처서는 아직입니다

-260

며칠 전의 일이다. 가끔 다니는 카페 게시판에 '이제 여름 끝났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고 클릭해 봤더니 오늘이 절기상 가을에 접어든다는 입추라고, 그래서 여름은 끝났다는 장난스러운 글이 올라와 있었고 그 아래로는 에어컨을 압수하갰다라든가 이 글 읽고 나서 3도쯤 더 더워진 것 같다든가 하는 볼멘소리로 가득 찬 댓글들이 몇 개 달려 있었다.


24 절기라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옛 농경 사회에서 농자를 짓는 스케줄을 기준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체감하는 계절감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좀 있을 수밖에 없다던가. 그러나 인간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24 절기는 계절이 흘러가는 속도를 정확하게 읽고 있기 때문에 입추가 지나고 나면 귀신같이 아침저녁의 바람에서 더운 기가 좀 빠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건 그러니까 언젠가 브런치에도 한 번 쓴 것 같은 8월 15일이 지나면 바닷물이 차가워져서 맨 몸으로 바다수영을 하기 힘들어진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뭐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제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다. 요즘 한낮의 더위는 열사병으로 길거리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어서 일찍 나갔다 일찍 들어오는 것만이 살 길이다 싶어 일찍 집을 나섰다. 그 탓인지 살갗에 들러붙는 공기가 각오한 것에 비해서는 좀 덜 덥게 느껴졌다. 그래서 점심시간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그의 사진액자에 나갔다 온 보고를 하면서 그래도 입추 지났다고 공기가 쬐끔 식었더라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건 한낮에 나갔다 오지 않은 자의 오만에 불과했다. 어제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 나는 내가 어제 대단한 말실수를 해버렸음을 알았다. 에어컨을 자제하는 오전 시간 내내 덥고 습한 공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기승스럽게 사람을 괴롭혔고, 결국 점심을 먹고 난 후 에어컨으로도 모자라 선풍기까지 틀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어디에 계시는지 모를 한낱 인간의 섣부른 소리에 비위가 상하신 분에게 입이 방정이었다고 사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름은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고, 이 더위가 한풀 꺾이기 위해서는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그때까지는 올여름 다 갔다 운운하는 말은 그저 입방정에 불과하니 잠시 넣어줘야겠다고.


요즘은 입추 매직은 거짓말이고 처서 매직이 진짜다, 하는 말이 있다. 올해 처서는 8월 22일로, 다음 주다. 그때는 어떨지 좀 기대를 해봐야겠다. 물론 생각으로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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