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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Aug 15. 2024

생명에 대한 예의

-262

이제 마음 좀 정리됐으면 강아지라도 한 마리 키워 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는 지인이 한 분 계신다. 그분 또한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친 우울증으로 한동안 고생하시다가 반려견을 키우는 것으로 극복해 낸 경험이 있으시기 때문일 테다. 뭔가가 있다가 없어져버린 빈자리는 결국 다른 뭔가로 채울 수밖에 없고, 내가 겪어본 바 사람보다 동물이 훨씬 더 조건 없는 애정을 주더라는 것이 그 이유다.


사실 반려동물 한 마리 길러보라는 말은 2년 전 그가 떠난 직후부터도 내내 듣던 말이다. 다니는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내내 집에 있으니 강아지든 고양이든 조그만 녀석으로 하나 정 붙이고 키워보면 마음을 다잡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뭐 그럴 것 같기는 하다. 생명이 떠나간 자리는 결국 생명으로밖에 채울 수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다른 게 아니라 그가 떠나간 후 들인 화분 두 개와 그의 책상에 꽂아놓는 꽃들을 보고 알았다. 직접적인 교감이 되지 않는 식물이 주는 위로도 이렇게나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는데 직접 내 살갗에 살갑게 몸을 부비며 다가오는 동물의 체온이라는 게 어떤 종류의 위로일 것인지, 그런 걸 생각하면 사실 혹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의 결론은 부정적인 쪽으로 난다. 객관적으로 나는 그리 부지런한 사람도 살가운 사람도 못 되며, 그런 내 곁에 오는 동물이 그리 행복할 것 같지 않아서다. 그가 급작스럽게 내 곁을 떠난 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 '아이가 없는 것'도 있었다. 소위 '새출발'을 하는 데 아이가 있으면 운신의 폭이 좁아질 것 같다거나 해서가 아니다. 아빠까지 잃어버린 그 아이에게 내가 온전한 하나의 세상이 되어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를 잃은 슬픔을, 외로움을, 절망을 아이에게 투영하지 않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아이 앞에서 함부로 토로하지 않는 씩씩한 어른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그를 잃어버리고 허한 이 마음을 엄연히 제 나름의 인생과 인격이 별도로 존재하는 아이에게 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고, 그를 갑자기 떠나보낸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기 위해 아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도 대개 비슷하다. 물론 내게 반려동물이 있다면 나는 그 반려동물을 잘 키우기 위해 내가 가용할 수 있는 돈과 마음과 수고를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 동물은 '나의 위로가 되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강아지든 고양이든 혹은 다른 동물이든, 그 동물은 나를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아닐 것이며, 그러나 나의 슬픔과 외로움을 나누자고 반려동물을 들이는 것은 조금은 온당하지 못하게 여겨지는 점이 있다.


일신에 매여 있는 번잡한 일들을 다 털어버리고 나면 적당히 한적한 곳으로 가서 마당에서 키울 만한 커다란 개 한 마리를 키우며 사는 것은 그와 나의 오래된 소원이기는 했다. 그러니 언젠가는 나도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떠밀 내 몫의 슬픔과 외로움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강아지 같은 걸 굳이 키우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괜찮아지고 나서야 나는 강아지를 키워볼 엄두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아마, 내가 차릴 수 있는 최소한의 생명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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