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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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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그의 책상에 놓아두는 꽃 상품 중에 '유찰꽃'이 있다. 말 그대로 경매장에 나갔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유찰되어 소매로 팔릴 루트가 막혀버린 꽃들이다. 시장에서 선호되는 크기가 아니라거나 색상이 균일하지 않다거나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는 하는데 나 같은 막눈이 보기에는 이 꽃이나 저 꽃이나 다 같이 예쁘고 고울뿐인 데다가 싼 가격에 훨씬 많은 꽃을 주기 때문에 상품이 나올 때마다 애용하고 있다.


다만 유찰꽃의 단점 아닌 단점은 배송 시기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경매 시장이 열리고 유찰된 꽃이 있어야 출고가 되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주문한 유찰 꽃 또한 내가 예상한 날짜를 이틀 정도 지나서, 오늘 오후쯤이나 되어야 집에 도착할 모양이다. 문제는, 오늘 내가 집에 없을 예정이라는 사실이다. 오늘 나는 현생에 얽힌 복잡한 문제 한 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오후 제법 늦게까지 밖에 있어야 한다. 하필 오늘 같은 날 배송일정이 잡히다니, 조금 원망스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름에 배송되는 꽃에는 보통 아이스팩이 같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아이스팩은 집 앞에 택배가 도착해 버선발로 뛰어나가 박스를 뜯고 만져보면 그냥 '얼음이 녹은' 정도가 아니라 '미지근한 물이 들어있는' 수준으로 녹아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꽃들의 줄기가 꽂혀있는 오아시스폼 또한 배송과정에서 받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뜨끈뜨끈하게 변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즘의 연일 계속되는 폭염 때문이다. 그래서 박스를 뜯어 꽃들을 벌려놓고, 곁잎을 따고 줄기를 다듬어 얼음을 넣은 꽃병에 꽂는 연신 아이고 이 더운 날에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네 하는 공치사를 한다. 그렇게 서둘러 꽃병에 꽂은 꽃병을 요즘은 대개 에어컨을 켜두는 시원한 방 안에 갖다 두면 저녁때쯤이 되면 축 쳐져 있던 꽃들이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야말로 꽃을 언박싱하는 재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내심 걱정이다. 오늘 내 볼일이 택배가 오기 전에 끝날 수 있을지. 오늘의 볼일을 보기 위해서는 꽤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하고, 그래서 길에 뿌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을 예정이고, 이런 시간은 내가 서두른다고 해도 단축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뜨뜻한 택배상자 속에 걷혀있을 꽃들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꽃들을 받자고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정도 아닌지라,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꽃들에게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비는 것뿐이다. 하긴 그렇다. 내가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는 회사에 다닌다면 언제나 내가 꽃이 든 택배 상자를 열어볼 수 있는 것은 최소한 7시쯤일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택배 기사님의 동선에 따라 꽤 저녁 늦게야 택배가 오는 경우도 있긴 하니까 오늘의 이 기다림에 대해 내가 구태여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사람 마음은 그게 아니어서, 과연 오늘 택배가 오기 전에 볼일을 무사히 다 보고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부디 오늘 우리 집으로 올 꽃들이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오늘 나의 외출 또한, 내가 바라는 소정의 성과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덥고 비까지 오는 날씨에, 참 바라는 것도 많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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