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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하루종일 오락가락하던 비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 그랬다. 그래서 어제 아침쯤엔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 쏟아지는 햇빛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 오늘도 날씨가 만만치 않겠구나 하고 창문을 여는 순간 들이닥치는 바람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잠깐 당황했다. 뭐지 이 나름대로 선선한 바람은? 까지 생각하다가, 드디어 그 '처서'가 왔음을 깨달았다.
예전의 절기는 어땠는지 몰라도 요즘의 입추는 '이제 여기서 더 더워지진 않음', 처서는 '이제부터 조금씩 덜 더워질 것임'이라는 의미라는 글을 인터넷 어디선가 봤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 어제는 하루 종일 열어놓은 창문으로 꽤 선들선들한 바람이 하루종일 불어서 나름 견딜만했다. 그 와중에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세서 창가에 두었던 인형이 몇 번이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는 얘기 정도는 덤이겠다.
물론, '아직 멀었다'. 아직도 추석 때까지는 계속 더울 것이고 이 더워는 9월 말 정도는 되어야 좀 사그라들 것이다. 아이고 이제 여름 다 갔네 하는 말을 섣부르게 꺼냈다가 멀지도 않은 바로 그다음 날 정도에 여름이 가긴 뭘 가냐고 그 말을 한 나 자신에게 때늦은 화풀이를 하는 날도 없지는 않을 것이며, 요즘 다시 유행할 조짐이 보인다는 코로나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끼고 나가는 마스크 속으로 차는 땀 또한 모르긴 해도 한동안은 더 나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꼭 그만큼이나 사실인 건 올여름도 이제 어영부영 터닝포인트를 돌았다는 사실이긴 하겠다. 여름만이 아니다. 올해의 터닝포인트를 돈 것이 벌써 한 달 반이 훌쩍 지나 두 달 가까이가 되어간다. 8월이 끝나면 이제 올해는 지나온 시간의 절반 밖에 남지 않는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냉방도 난방도 필요 없는 '딱 좋은' 기온은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가 고작일 테고 어느샌가 '더워 죽겠네' 대신 '추워 죽겠네'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계절의 초입까지 우리는 밀려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한낮의 더위가 만만치 않아 에어컨을 켜고는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이제 슬슬 에어컨의 냉기가 버거워지는 날이 올 테지. 선풍기로 충분했다가, 선풍기 또한 켜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만하다 싶다가, 여름 한 철 잘 사용한 선풍기를 닦아서 싸 넣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워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런 날씨에 아직도 선풍기가 나와 있는 건 인간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냐 하는 생각에 마지못해 선풍기를 싸 넣는 그런 날도 올 것이다. 우리야 알든 모르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시간은 또 이렇게 꾸역꾸역 흘러가고 있다.
생각보다 꽤 멀리 온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 그리 멀리 오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혼자 남은지 2년 반 남짓이라는 이 시간의 무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