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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은 고달프다. 갑의 한 마디에 열심히 세운 일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라면 아마 공감할 수 있으실 테다. 주말 내내 이렇게 저렇게 세워 놓은 나의 일정은 거래처 담당자님의 '결과물 너무 마음에 드는데 지금 당장 봤으면 좋겠는데요'라는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도리 없었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가방을 챙기고는, 거래처의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이 마당에 날로 한 시간을 더 기다리라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도착하기 위해 버스 안에서도 열심히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그렇게 가까스로 점심시간이 되기 전 작업물을 전달하고, 비실비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이 덥고 습한 날에 이제부터 집에 돌아가서 뭐가 됐든 가스불 앞에 붙어 서서 끓이거나 데우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생각만으로도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났다. 그래서, 그 핑계를 대고 오늘도 옆길로 새서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나 훌쩍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봉안당까지는 버스를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한다. 거래처에서도 바로 가는 버스는 없어서 중간에 한 번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문제는 갈아탄 두 번째 버스를 타고 중간 정도 왔을 때 벌어졌다. 갑자기 차창 밖으로 한 두 방울 빗발이 듣기 시작하더니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의 바퀴 옆으로 물보라가 튀는 기세를 보니 꽤 극성맞게 내리는 모양이었다. 아. 나 우산도 안 들고 왔는데. 빨리 들어갈 거라고 창문도 활짝 열어놓고 왔는데. 또 모니터에 비 맞아서 습기 차는 거 아냐?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서 내려서 되돌아가본들 내가 이 비를 맞지 않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이미 없었다. 그냥 정류장에 내려서 봉안당까지 가는 비탈길을 미친 듯이 뛰는 수밖에. 돌아올 때야 면식 있는 직원 분에게 부탁해서 방문객용 우산 하나 빌리면 되겠지.
그러나 비는 두세 정거장 앞에서부터 슬금슬금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내가 내릴 때쯤 되자 귀신같이 멎어 있었다. 정류장에 내려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아이고 우리 신랑 고생하네, 하는 공치사를 건넸다. 그렇게 나는 우산도 안 들고 나온 것치고는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유유히, 봉안당까지의 꽤 먼 길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우리 동네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지 한껏 열어놓고 나간 창문으로도 비가 들이친 흔적 같은 것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참, 거기 가서도 내가 신경 쓰여 죽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말았다. 그런데 비는 좀 맞아도 죽진 않잖아.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렇다고 너무 안 쓰지는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의 사진 액자에 대고 외출 보고 겸 그런 말을 한다. 이게 신경 써달라는 말인지 쓰지 말라는 말인지 불분명하다는 건 접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