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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매일 아침에 올리는 내 글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자리에서 0부터 100까지를 전부 다 쓰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는 않다. 대부분 발행 전에, 이런 이야기 한 번쯤 써야지 싶거나 아 이 이야기는 오늘 좀 재미있었으니 한 번쯤 글로 풀어볼 만하겠다 싶은 것들을 대략의 제목과 나나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두서없는 두세 문장 정도를 대충 써넣은 뒤 일단 저장을 해 둔다. 그리고는 그중 하나를 끄집어 내 살을 붙이고 정서해서 아침에 발행하는 식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내용을 대략 써놓는다는 저 '대략'이 너무나 대략이어서 며칠이 지난 후에 보면 나조차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건지 오리무중에 빠지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저께는 좀 간만에, 그런 '메모' 정도 수준으로 그쳤어야 할 초고 단계에서 이런저런 자잘한 할 말들이 많이도 생각났다. 그래서 문장은 꾸역꾸역 길어졌고 글은 점점 디테일해져 갔다. 이러다가 그냥 내일 아침에 쓸 내용까지 지금 다 써놔 버려도 괜찮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버스 차창 밖으로 기승스레 퍼붓던 소나기를 보고 내 가방 속에 우산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의 당혹감과, 몇 정거장을 더 가서 버스에서 내렸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개어 있던 하늘을 바라보던 내 마음 같은 것들이 그 순간 너무 왈칵 터져 나오는 감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주절주절 써 내려가기 시작한 내 글은 그대로 발행해도 별로 크게 무리는 없을 만큼의 길이가 되었다. 아. 내일 아침에는 별로 많이 덧불일 얘기가 없겠구나. 홀가분하게 생각을 하고 '저장'을 누른답시고 눌렀는데 뭔가를 잘못한 것인지 글은 고스란히 발행되어 다음 회차로 걸리고 말았다.


순간 아차 싶었다. 사실 여기서부터 이미 스텝이 꼬였다. 이 브런치에는 아무런 규칙도 테마도 없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나 혼자 주절거릴 따름이니 저녁 시간쯤 글 한 편 더 올라간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질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매일 아침마다 한편이라는. 이 브런치가 열리고 750편 가까이 글을 쓰는 동안 한 번도 어긴 적 없었던 규칙이 어그러진 것에 몹시 당황한 나는 불문곡직 '삭제'를 눌러 글을 지우고 말았다. 여기서 지워도 저장함이나 발행 취소글 같은 데 들어가 보면 남아있겠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삭제와 발행 취소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지워버린 글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업었다. 브런치 모든 메뉴를 다 뒤져봐도 남아있지 않았다. 삭제해 버린 글 되살리는 방법이 없나 하고 구글링까지 동원해 검색해 봤지만 이미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삭제는 신중하게'라는 교훈만 얻어가신 브런치 선배님들이 몇 분이나 계사다는 사실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글을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기운이 쫙 빠졌다. 몰라. 안 해. 누가 그러란 사람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상해서 그렇게 냅다 한 마디 중얼거리고는, 나는 거기서 손을 놓아버렸다. 그러니 어제 발행한 예의 소나기에 관한 글은 그런 식으로 김이 한 번 새 버린 후에, 그래도 어떻게든 마음을 잡고 다시 쓴 재고판인 셈이다.


뭐든 그렇다. 저지르긴 쉬워도 수습은 어렵고, 덜컥 없애버리긴 쉬워도 그걸 다시 되살리는 건 어렵다. 이 손바닥만 한 브런치에 올린 글 하나 삭제하고 다시 살리는 것도 그런데 사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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