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포장 아르바이트 거리를 주셨던 지인이 근처에 지나는 길에 들렀다면서 잠시 집에 들러서 어디서 얻은 건지 모를 세럼 샘플을 그야말로 한 꾸러미 주고 가셨다. 일평생 꾸미고 사는 데 관심이라고는 없었고 그래서 화장품 브랜드 제대로 아는 것이 두 손을 다 꼽기도 조금 버거운 나 같은 사람도 이름은 들어서 알 정도의 꽤 유명한 브랜드의 세럼이었다.
하루를 대충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와 기초화장품 몇 가지를 바르다가 갑자기 그 세럼 샘플에 눈이 갔다. 언젠가 한 번 브런치에도 쓴 말 같지만 화장품 샘플이라는 것은 괜히 잘 뒀다가 어디 갈 때 써야지 하고 아껴뒀다가는 그야말로 유통기한을 넘겨서 싸그리 버리게 되기가 십상이라, 이 세럼 샘플 또한 그렇게 되기 전에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써서 기분 좋게 소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중 한 팩을 뜯어서 일단 손등에 약간 덜었다. 어라. 생각했던 것보다 제형이 좀 되직했다. 조금씩 찍어서 얼굴 이곳저곳에 바르고 나니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뭔가 피부에 매우 잘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향도 내가 쓰는 그렇고 그런 세럼과는 달리 매우 고급졌다. 비싸다더니 돈값하네. 그것이 내가 그 샘플을 써 보고 느낀 소감이었다.
화장품이 다 화장품이고 결국 바르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라는 내 신조와는 별개로 이 세럼은 꽤 늦은 시간까지도 촉촉하게 얼굴에 남아있었다. 이제 이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나면 어어하는 사이 날씨는 추워질 것이고 그러면 또 부지런히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발라야 하는 시기가 올 텐데, 이 세럼 도대체 얼마나 하나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내가 이름을 알 정도면 싸지는 않겠지만 다른 데 돈 좀 덜 쓰더라도 간만에 비싸고 좋은 세럼 한 번 사서 발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샘플에 적힌 제품명으로 검색을 한 번 해 본 나는 그야말로 '눈 버렸다'는 기분에 재빨리 창을 닫고 시침을 뚝 뗐다. 50밀리리터짜리 본품 한 병이 20만 원도 훌쩍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물론 손품을 좀 팔면 그보다 좀 더 싼 판매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운이 좋으면 핫딜이라든지에서 좀 많이 다운된 가격으로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만 원이라니, 세상에나. 그거면 한 달 동안 마트에서 장을 볼 수 있는 돈이고 우리 집 인터넷 요금 석 달 치를 낼 돈이고 그의 제사상 한 번을 차려주고도 거스름이 몇 만 원 남을 돈이고 가끔 입맛 없는 날 먹으러 가는 초밥 런치를 20번 좀 안 되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그걸 그까짓 세럼 한 병과 바꾼다니, 내 기준으로는 안 될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럴 때가 아니면 평생 써 볼 일이 없을 이 비싼 세럼 샘플을 한동안 원 없이 쓸 수 있게 해 준 지인분에게 새삼 감사하는 선에서 이 때아닌 세럼 소동을 마무리짓기로 했다.
예전부터 흔히 떠돌던 낭설인데 화장품은 본품보다 샘플이 훨씬 품질이 좋다고 한다. 그래야 샘플을 써보고 '낚인' 사람들이 본품을 많이 사 갈게 아니냐고. 아마 이 세럼도 그럴 거라고, 괜히 제가 따먹지 못할 높이에 매달린 포도를 쳐다보는 여우의 심정으로 투덜거려 본다. 아마 본품은 이것만큼 좋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고. 그러게 비싼 세럼은 아무나 쓰냐며, 그는 그렇게 혀를 차고 있을지도 모르겠다.